동남아의 가문과 혈통을 따지지 않는 사회
동남아인들은 다수가 여전히 성이 없거나 지금 존재하는 성들은 근대 이후에 생겨났다. 성이 없으니 혈통이 있을 수 없고, 가문이나 집안이 그리 중요할리 없다. 자신과 가족, 가까운 친척이 그들의 조그만 친족집단을 구성할 뿐이다.
동남아의 친족체계는 대개 “양변제(兩邊制)”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동남아 사람들의 가계, 친척, 상속은 부계 한쪽만이 아니라 모계, 즉 어머니 쪽도 따진다는 뜻일 뿐이다. 즉 부모 양쪽으로 서로 알고 지내는 모든 친척들이 다 친족의 범위에 포함된다. 모계도 포한한다는 말은 여성이 친족체계나 가족제도에서 중요한 역할과 지위를 가짐을 반영한다. 생면부지의 사람도 본관과 성씨를 공유하면 혈족집단으로서 친족을 구성하는 한국의 관습이나 제도와는 다르게, 먼 친척이라 할지라고 본인이 잘 알거나 가깝게 지내는 경우에만 친족의 범위에 해당된다.
“딸이 재산”이란 금언이 있던 동남아에서는 딸을 아들보다 선호하는 종족사회의 수가 더 많았다. 또한 이혼이나 별거하는 부부가 흔한 동남에서 한 부모 자녀들이 이모, 외삼촌, 외갓집 등에서 자라는 경우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고, 전통적인 결혼관습을 보면 신혼부부가 새로 집을 마련해 나가지 않으면 대부분 신부 친정에 새살림을 마련하는 “부처제(婦處制, uxorilocality)”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18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인구는 희소한데 농사지을 경작지와 집을 지을 대지가 무한하여 결혼하면 독립하여 새집을 짓고 새로운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여기서 가사나 논농사는 대부분 여성이 담당했으니, 아내가 독자적인 재원이나 권력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동남아의 여성과 남성은 “안”과 “밖”으로 구분되어, 돈을 벌든 이혼을 하게 되든 집을 떠나야 하는 쪽은 남편이었고, 아내는 항상 가정의 중심이었다.
동남의 친족체계만큼이나 가족제도 역시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동남아 전통사회를 다른 사회와 뚜렷이 선을 긋는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바로 동남아의 핵가족이다.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이 핵가족은 “희소한 인구와 무한한 토지”라는 천혜의 생태조건 덕분에 태초부터 가능했던 것이다. 마을에서 새로운 부부가 탄생하면 마을사람들 대여섯 사람이 사나흘 뚝딱거리면 소박한 주상가옥 한 채를 거뜬히 지을 수 있으니, 이른바 “신처제(新處制, neolocality)”가 동남의 전형적 주거방식이 된 것도 이러한 환경과 물적 토대 덕분이다.
동남아 가족에게 아내와 어머니는 한국의 어머니보다 훨씬 폭넓은 범위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과 역할을 수행한다. 여성들은 전통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부분인 논밭과 상업부분인 시장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가계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다. 자식들과의 관계에서도 훨씬 더 친밀하고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 동남아 가족의 가장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단정 지어도 큰 과장은 아니다. 그래서 부부가 이혼을 해도 아버지를 따라가는 자식은 거의 없었고, 대다수가 어머니나 외가의 손에서 키워졌다. 동남아의 친족체계, 가족제도, 부부관계에도 모순과 억압 그리고 불평등의 바람이 불어오는데 그 계기는 서쪽에서부터 유래한 유일신을 믿는 외래종교의 전파 때문이다. 적어도 동남에서만큼은 모든 세계종교가 여성 억압적이다.
동남아에는 "신부대(bride wealth)"가 있다. 마음에 드는 신붓감으로부터 결혼동의를 받으면 신랑은 신부 측에게 돈이나 금 또는 다른 현금가치가 있는 것을 제공해야 신부 측의 허락을 얻게 되는 관습이다. 만약 그럴 만한 재력이 없으면 데릴사위로 들어가 수년간 일을 해주며 처가살이를 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는 신부대로 받은 돈을 신부 부모나 가족이 갖는 것이 아니라 신부가 자기 몫으로 간직했다. 이 신부대는 동남아에서 여성의 높은 "가치와 지위"가 사회관습과 제도에 반영된 결과이다. 주로 여성들이 논밭과 시장에서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던 동남아 전통사회에서 이들의 지위가 남성 못지않게 높고 그런 만큼 여자가 귀중하게 여겨진 것은 당연하다. 또한 신부대의 관습이나 여성의 높은 지위는 동남에서 보편적인 핵가족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결혼과정과 생활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혼으로 이어진다. 이혼이 쉽고 흔한 것은 동남의의 문화요 관습 탓이다. 동남아가 다종족 사회이다 보니 다른 종족, 민족간에 결혼이 흔할 수밖에 없고, 국제결혼에 대해서도 별 거부감이나 금기가 없다. 결혼이 문화와 국경을 넘나들다 보니, 결혼한 경험이나 나이의 차이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질 않는다.
- 동남의 문화산책
- 지은이 : 신윤환
- 펴낸곳 : (주)창비
- 초판 1쇄 2008. 11. 21
- pp 91 ~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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