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 이야기

소설 상록수의 산실 당진 필경사와 심훈기념관을 돌아보다.

산들행 2017. 12. 26. 11:45

당진 필경사(筆 붓 필밭갈 경집 사)는 충남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97(부곡리)에 있다.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이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으로,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집필하던 곳이다. 필경(筆 붓 필 밭갈 경)은 붓으로 마음의 밭을 갈 듯, 조선인의 의식을 계몽하기 위한 의지가 담긴 말이다.


필경사 전경

심훈(1901~1936)은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소설가, 시인, 영화인로서, 35살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항일 저항운동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큰 족적을 남겼다. 심훈은 늘 푸르고자 했던 항일민족문학의 영원한 청년이다. 


필경사 심훈의 집

정면 5칸, 측면 2칸이니 합계 10칸의 초가집으로, 한국의 전형적인 초가집과는 형태가 많이 다르다. 12살 어린 부인과 아이들을 위하여 초가집 안에 화장실을 두었고, 유리창도 있으며, 작으나마 화분을 놓을 수 있는 베란다도 있다. 초가집과 도시주택의 장점을 택하여 지은 듯 하다. 심훈이 살던 때는 집 근방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는데,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사방이 논으로 개척되었고,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심훈 기념관 내부이다. 문화해설사가 심훈의 일대기와 작품활동 등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준다. 경성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동기생으로 동요 <반달>의 작가 윤극영,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 박열, 공산주의 운동가 박현영 등이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이지만 그때에는 일제강점기에서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단다. 1919년 3.1운동때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4학년) 투옥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영화 '장한몽'의 남자주인공이 실종되는 바람에 대신 주연으로 영화에 출연하였고, 영화 "먼동이 틀 때"의 원작, 각색, 감독하였다고 한다.


심훈 기념관 전경


심훈! 저항의식과 예언자적 지성, 민중적 생명력을 문학으로 표현하다.


어제도 오늘도 산란한 혁명의 꿈자리!

용솟음치는 붉은 피 뿌릴 곳을 찾는

'까오리' 망명객의 심사를 뉘라서 알고

영희원(影戱院)의 샨데리아만 눈물에 젖네.


(까오리는 高麗(고려)의 중국어 발음,

샨데리아는 샹들리에??)

      


   


문화해설사가 심훈의 「상록수(1935)」의 배경과 의의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양희은이 노래한  김민기 작곡「상록수」는 공장 노동자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지은 노래이니 심훈 소설 「상록수」와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돌보는 사람 없으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끝내 이기리라'는 다짐은 같은 것이다. 심훈기념관 출입문에서 문화해설사는  야구 타격폼을 선보였다. 심훈이 지은 일제강점기 최초의 '야구'라는 시가 있다. 그래서  2016년 9월 16일 심훈 선생 추모 60주년을 기념하여 심훈 선생의 종손 심천보씨가 한화 이글스의 롯데전 홈경기에서 시구하였다고 한다. 야구 유니폼은 그때 심훈 선생의 종손 심천보씨가 입었던 옷이다. 


야      구
                                                         심    훈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던 야구장으로 오라!
마음껏 소리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

6월의 태양이 끓어내리는 그라운드에
상록수(常綠樹)와 같이 버티고 선 점(點)·점(點)·점(點)……
꿈틀거리는 그네들의 혈관 속에는

붉은 피가 쭈 ㄱ 쭈 ㄱ  뻗어 흐른다.

피처의 꽂아넣는 스트라익은 수척(手擲)의 폭탄(爆彈)
HOME-RUN BAT! HOME-RUN BAT
배트로 갈겨내친 히트는 수뢰(水雷)의 포환(砲丸),
시푸른 하늘 바다로 번개 같이 날은다.

VICTORY! VICTORY VICTORY, VICTORY!
고함소리에 무너지는 군중(群衆)의 성벽(城壁),
찔려 죽어도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싸우는
이 나라 젊은이의 의기(意氣)를 보라!
지고도 웃으며 적의 손을 잡는
이 땅에 자라난 남아(男兒)의 도량(度量)을 보라!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던 야구장으로,
마음껏 소리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
                                             (1929. 6. 10 조선일보)

 


소설 직녀성에 대한 설명과 시비 '그날이 오면'

 


상록수는 농촌계몽 소설이다. 농촌운동가의 희생적인 봉사와 추악한 이기주의자들의 비인간성의 대비를  통하여 민족주의와 종교적 휴머니즘 및 저항의식을 고취한 작품이다. 악덕지주이자 고리대금업자인 강기천의 악행도 나온다. 소싯적에 아주 감명깊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남자 주인공인 박동혁은 심훈 선생의 장조카인 심재영을 모델로 삼았고, 고 심재영은 동네 청년들과 공동경작회를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여자 주인공인 채영신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마을에서 실제 농촌계몽운동을 했던 최용신(1909~1935)을 모델로 삼았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 최용신 기념관도 있고, 상록수역도 이를 기념하기 위함이란다. 기회되면 최용신 기념관도 가봐야겠다.

   


필경사 인근에 소나무숲이 아름다운 '심재영 고택', '상록수 교회'가 있고, 상록학원터 푯말도 보였다. 시집 '그날이 오면'은 심훈기념관에 2,000원을 기부하면 얻을 수 있다.

 


인근이 있는 중화요리집 동보성(東寶城)에서 점심을 먹었다. 황제짬뽕과 황제짜장도 있는데, 낙지가 추가된다고 한다. 다음에 오면 먹어봐야겠다.

 


심훈의 대표적인 시 '그날이 오면'은 일제 치하에서는 발표되지 않았고, 해방 후 1949년 그의 유고집인 <그날이 오면>을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그날이 오면

                                                           심훈<1949>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린픽 마라톤 경주에서 손기정 선수가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남승룡 선수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심훈은 신문 호외 뒷면에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즉흥시를 썼고, 이 시는 심훈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으며, 심훈의 장례에서 여운형에 의해 낭송되었고, 자신의 만가가 되었다.


오오, 조선(朝鮮)의 남아(男兒)여!
-백림(伯林, 베를린)마라톤에 우승한 손(孫), 남(南) 양군(兩君)에게 
                                                                    심훈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號外)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異域)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心臟)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 백만(二千三百萬)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戰勝)의 방울소리에 터질  찢어질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의 전승(戰勝)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精靈)이 가호(加護)하였음에
두 용사(勇士)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1936.8.10. 새벽 신문호의 뒷장에 쓴 절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