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밀, 기타 맥류

주정일의 희망의 소 키우기와 곡식 보리, 보릿고개에 대한 단상

산들행 2019. 12. 19. 06:59

오래전에 소는 누가 키우나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소를 가족의 일원처럼 애지중지 키울 때가 있었다. 여물을 쑤어 따뜻한 소밥을 먹이고, 꼴을 베어다 주는 것은 물론 소를 몰고 산으로 들로 신선한 풀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소가 거주하는 외양간에는 잠자리가 불편할세라 짚 등을 넣어주고, 배설물과 비벼져 만들어진 퇴비는 거름으로 이용하였다. 지금도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하고 읊조리면 소가 한가로이 되새김질 하던 옛 시골풍경이 떠오른다. 이때의 농촌에는 사람이 소보다 훨씬 많았다. 이때 소는 온 가족이 키웠다.

 

이제는 소가 사람을 데리고 산다. 소를 많이 키우는 축산단지를 가보면 사람이 거주하는 집 주위로 온통 축사이다. 이제는 한 가정에 한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에서부터 수백 마리씩 키우고 있다. 사람은 소에게 밥을 주는 집사가 된지 오래다. 이제는 농촌에 농업인구보다 가축수가 더 많다. 그것도 소는 살쪘고 농부는 연로하다. 요즘은 소를 농업경영체가 키운다.

 

농촌의 풍경이 바뀐 것은 소먹이가 볏짚, 풀 그리고 곡물 부산물에서 수입 곡물과 수입 조사료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먹이가 바뀌니 배설물도 달라졌다. 짚들을 넣어 마굿간에서 만들어진 거름이 구비(마굿간 구 거름 비)이고, 산야초 등을 베어다가 축분과 켜켜이 쌓아 만든 거름이 퇴비(쌓을 퇴 거름 비)인데, 지금은 소의 배설물을 말려서 쌓아놓으니 그냥 축분(쌓을 축 똥 분)이다. 섬유질이 많은 조사료를 먹은 배설물은 똥글똥글하니 뭉텡이로 떨어지는데 요즘 소들은 물변을 싼다. 곡물을 먹이로 삼다보니 섬유질이 없어서 배설물이 뭉쳐지지 않는 것이다. 쇠똥구리가 뭉쳐지지 않는 배설물 때문에 번식하지 못하여 사라진 것이 아닌지 의문이다. 소는 곡물 사료를 먹고 물변을 싸고 싶을까? 아니면 볏짚 등 섬유질이 많은 먹이를 먹고 싶지 않을까? 다들 답을 알고는 있다. 소는 여물이나 풀로 농부가 키워야 한다는 것을! 그게 소의 먹이 습성에 가장 알맞다는 것을!

 

초고속열차인 떼제베(TGV)를 타고 프랑스를 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 본 프랑스의 푸른 들녘을 보니 노래가 절로 나왔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어~~남진의 님과 함께라는 노래였다. 나 어릴 적에 이 유행가를 그냥 흥겹게 따라 불렀지만, 님과 함께 가장 알맞은 그림 같은 풍경을 다른 나라에서 본 것이다. 프랑스에서 본 것처럼 그런 그림 같은 초원을 우리 땅에 만들 수는 없을까? 벼를 거둔 논들은 다음 세대의 모가 심어지기 까지 6개월은 그냥 비어있다. 주인이 없는 논에 청보리, 밀 등 동계작물을 심으면 그 작물이 그 땅의 주인이 된다. 바로 농토가 저 푸른 초원이 되는 것이다. 산 밑의 조그만 다랑이 밭들도 어르신들이 은퇴하면 더 이상 밭일 수 없다. 호미로 쪼그려 일구던 시대가 지났으니 넓은 초지로 개간되어야 한다. 그런 곳에는 농기계로 손쉽게 재배할 수 있는 사료작물이 적합하다. 한 동네의 너른 농토를 소 한 마리가 갈고 써레질 했던 그 시절은 이미 갔고, 이제는 힘 좋은 트랙터가 한 동네에 여러 대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저 푸른 초원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논에 맥류를 심어 저 푸른 초원을 만들자는 것이 우리집 소에게만 좋을까? 아니다. 도로를 타고 가는 모든 국민에게 푸른 초원을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다. 하다못해 도심 공원을 가꾸기 위해, 도로변의 경관 미화를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입하는데, 농부는 스스로 온 국토를 푸르게 가꾸어 공짜로 제공하니 이보다 더 좋은 재능기부가 없다. 조그마한 관심과 지원만 있으면 될 것이다. 사람복지만 챙길게 아니라 자연복지, 동물복지도 챙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복지를 위해 비료와 거름으로 작물을 키우면서 국토를 푸르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농업인뿐이다. 작은 관심과 지원으로 더 푸르게 더 넓게 만들 수 있다.

 

경제성으로 따지면 저 논들은 겨우내 황량한 들녘으로 묵히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십원짜리도 많이 모으면 큰돈이 된다라는 개념으로 보면 저 들녘을 자연복지, 동물복지 정책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사실 외국에서 곡물농업이 번성하는 게 단위면적당 소득이 높아서가 아닐 것이다. 한국이 적은 면적에 고소득 작물을 심을 때 외국은 보다 넓은 농토에서 일원짜리를 열심히 모으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의 밀림을 개간하는 것도 일원짜리 콩을 생산하여 많이 모으면 억대에서부터 수조원이 넘어가니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선진국은 그림 같은 초원을 넓히면서까지 곡물을 생산하고, 남는다고 강매하는 수출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다.

 

보릿고개란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겨우내 먹었던 쌀 등 식량이 떨어지고 여름에 생산되는 각종 먹거리는 요원한데 아직 보리가 익지 않은 때이다. 보릿고개를 잘 넘기면 다시금 먹거리는 숨통이 트이고 힘든 농사일이 시작된다. 즉 보릿고개란 말은 배고픔의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사실 보리는 한 곡기에서 다음 곡기로 이어주는 생명의 먹거리였던 것이다. 보리 등 맥류가 보전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런 희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보릿고개에 보리로 생명을 이어갔듯이 한국의 소는 청보리를 먹고 뜨거운 여름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한여름의 태양을 받고 자란 쌀을 음의 기운이 강한 겨울에 먹는 것과 같이, 겨울동안 차가운 음의 기운을 받고 자란 청보리를 뜨거운 여름에 소가 먹어야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리는 계절을 이어주면서 건강 먹거리가 되는 희망의 전령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농업은 역사적으로 보면 끊임없이 변했다. , 보리, , , 기장 등 우리나라의 오곡은 이제 더 이상 오곡이라 할 수 없고, 쌀만 제대로 생산되는 일곡 시대이다. , 기장은 어떻게 생긴 작물인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보리는 보릿고개라는 이름으로 잊어버린 작물이 되었으며, 콩은 많은 양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나마 쌀은 자급할 수 있어 일곡은 유지하고 있지 않느냐고 위안할 수는 있다. 옥수수, 밀이 우리 역사상 삼곡의 하나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입 곡물에 의하여 풍부한 먹거리를 누리는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오곡 생산은 일곡 생산으로 줄어들었으며 식량 종속은 더욱 심화되었다. 세계가 활발히 교역하는 세계화 시대에 오곡의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섬유질을 먹어야 할 소마저 옥수수, 콩 등 수입 곡물로 키워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소는 여전히 우리 농부가 키워야 한다. 우리나라 작물을 우리 땅에 키워서 먹여야 한다. 안전한 소먹이를 생산하기 위해서 들녘에 푸른 초원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소도 키우고 국민에게 대한민국이라는 푸르른 농원을 선사해야 한다. 그것이 미래를 위해 꼭 해야 할 일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여건은 항상 변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