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군이 오늘날 구기자 특산지로 된 유래를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7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양에 제일 먼저 구기자를 재배하여 생업과 산업에 도움이 되도록 한 사람은 당시 공주군 신풍면 토동(兎洞, 속칭 토끼울)에 살던 소헌(素軒) 박관용(朴寬容) 선생의 집념과 의지의 결과라고 전해진다.
선생은 사서오경에 통달하고 한시와 문장에 밝은 한학자인데 구기자 재배 등 약초재배가 인연이 되어 현재는 한의사로서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에서 한의원(신경한의원)을 개업하고 있다.
실로 선생은 15세 이후 젊은이 시절에는 구기자에 미친 사람, 중년에는 구기자 아저씨로, 만년에는 구기자 할아버지로 구기자의 본 고장인 청양에서는 물론 서울의 원로 한약인들 사이에서 불리어지고 있다.
선생의 본관은 죽산(竹山)으로서 이조 예종때 영의정 시호 文憲公 호 晩節堂 朴元亨의 15세 손이다. 인조때 정묘호란시의 충신 병조참판 박신용(朴信龍)은 선생의 10대 조부인데 청양군 운곡면 위라리 소재 유의각(遺衣閣)에는 인조임금이 하사한 충절의 옷이 옛것 그대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선생의 가계가 이곳 청양에 자리잡게 된 연유는 선생의 10대조인 박신용 장군이 정묘호란때 순절하자 장군의 아들 둘이 난리를 피하여 모친과 함께 운곡면 위라리에 정착하면서 부터이다.
박관용 선생은 1908년 이곳에서 출생하여 7살부터는 공주군 신풍면 토동(토끼울)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1922년경 15세때, 선생은 자택 울타리 바깥 하얀색 나무줄기에서 빨간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이름이 구기자인데 약으로 쓰이는 것으로써 그 열매를 말려 놓으면 가을에 상인들이 와서 사간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값이 얼마냐고 물어보았더니 쌀 때는 근당(600g) 70~80전, 비쌀 때는 1원이 넘는다고 하였다 한다. 당시 땅 한 평에 10전, 20전 할 때인데 값이 좋으므로 구기자를 잘만 재배하면 농촌이 부자가 되는 길이 여기서 열릴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구기자는 야생으로 담장 밖이나 밭두둑 한 귀퉁이에 몇 그루씩 자라는 정도에 불과했고, 특별히 농작물로 재배하는 농가는 전혀 없었다. 농촌에서는 이 야생 구기자를 열매가 익으면 겨우 한 두근 정도 따서 말려 모아두었다가 내다 팔아 가용에 보태곤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선생은 구기자 재배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에서 구기자 묘목을 채취하여 시험재배를 시작하였는데, 여러곳에서 채취한 종자중 집근처(공주군 신풍면 토동)에서 채집한 것이가장 우량품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선생은 본격적으로 종자를 개량하는 한편 어떠한 거름을 주면 잘 크고, 거름을 주는 시기는 언제가 좋은가를 연구하고 구기자를 말려서 상품화 하는 방법, 즉 건조관리법을 창안하는 등 구기자를 이 고장의 토양과 기후에 맞게 기르는 법을 연구해 나갔다. 이때가 선생이 "구기자에 미친 젊은이"라는 별명을 듣던 때이다.
선생은 몇번의 시험재배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당시 농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높은 소득을 올리게 되어 "구기자를 심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위에 보여 주었다.
이 때가 선생이 19세 되던 때라 한다. 선생은 나이가 어려 재산에 대한 권리가 없어, 농토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없는 형편에 있었으므로 겨우 밭 300평에다 구기자를 심었는데 말린 구기자 170근(102kg)을 수확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시가로 근당 1원 70전 총액 290원의 소득이었다. 그때 농지의 가격은 밭 한평에 10~20전이면 구입할 수 있었는데 그 돈이면 밭 300평(10a)을 여러곱 사고도 남는 수확을 거둔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780평(26a)을 심었는데 마른 구기자 4,030근(2,418kg)을 수확하게 되었다. 이는 평당 5근을 수확한 셈이다. 이때부터 선생은 청양군 목면 신흥리 임장굴 마을에 "박관용 생약시험장"이라는 명칭으로 구기자 농장을 본격적으로 경영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후 6,000평(2ha)까지 확장하였다.
구기자 시험재배 초기에는 인근 농민들에게 구기자 심기를 권유하여도 너나 할 것 없이 신통치 않게 생각하여 심지를 아니하였다. 그러나 시험재배가 성공하고 큰 소득이 있게 되자 "구기자를 심으면 부자가 된다"는 소문이 퍼져 선생이 구기자를 시작한지 7~8년후인 1930년 이후부터는 한집 두집 구기자를 심는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선생은 그후 구기자 재배결과가 밑거름이 되어 서울로 진출하게 되었고 당시 한약업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회사인 (주)천일약업사와 합작하여 약초재배 및 판매전문회사인 "연수약업사(延壽藥業社)"를 창설하고 그 활동영역을 청양에서 전국적으로, 또한 일본, 홍콩, 만주, 중국가지 확대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청양에서 생산된 구기자의 서울 판로도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아무튼 청양에서는 선생의 구기자 재배 성공과 피폐한 농촌을 널리 부강하게 하겠다는 선각자적인 의지로 날로 구기자를 심는 농가가 늘어나게 되었고, 일제가 끝나고 새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구기자 재배농가는 계속해서 늘어나게 되어 청양이 전국에서 손꼽는 구기자 특산지로 성장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우리의 농촌 형편이 입은 많으나 산업이 황폐화되어 인력이 남아돌고 또한 식구는 많으나 땅 한평 없이 사는 사람이 많았던 시절이라, 구기자 농사가 까다롭고 힘은 들지만 잘 가구어 거두면 논농사 밭농사보다 몇곱절 이익이 있기 때문이었다.
발행내역
- 청양이 구기자의 본 고장이 된 유래
- 1992년 2월 발행
- 연락처 : 신경한의원(서울 은평구 갈현동 394-9)
- 정리 : 박재택(朴載宅)
- 페이지수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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