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밀, 기타 맥류

보리밭과 신데렐라 구두의 추억

산들행 2017. 3. 26. 13:33

그가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주문진 소학교 선생님으로 있다고 했다. 사범학교를 나와 부임했다니 겨우 우리네와 동값내기거나 아래일 것이 분명했다. 소녀였지만 그녀는 하여튼 선생님인 것이다. 그가 주문진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기 전에 우리는 선창가 언저리를 돌아다니다가, 뱃사람들이나 가끔씩 들를 것 같은 구석진 모퉁이의 작은 선술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앉았다. 그에게는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건만 심중을 털어놓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선창이 멀리 내다보이는 일본식 이층의 여인숙에 방을 정하고 주문진으로 그녀를 만나러 간 친구를 기다렸다. 그는 통금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더니 한시가 넘어서야 술에 만취해서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무렵에 젊은 여자들 사이에 대유행이던 흰색 하이힐을 비좁은 방 가운데로 던졌다. 나는 이불 위에 떨어진 여자 구두를 내다보았다. 잠이 번쩍 깨는 느낌이었다. 엽기적인 생각과 함께 그가 성공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부러움이 동시에 지나갔다. 그렇지만 그는 사건의 전말을 절대로 애기하지 않았고, 취해서 시뻘건 눈으로 자기 청춘의 시대가 이것으로 막을 내렸노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한달 뒤에 군대에 갔고 몇 년 후에야 제대한 그에게서 그날 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여선생님을 만나서 다방에 앉아 청혼을 했다고, 그녀는 어리둥절하니 놀라서 말을 못 하더라는 것, 마침 휘영청 달이 밝은데 그가 여선생을 하숙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고, 걷다가 이제는 마지막 표적이라도 남기겠다며 그가 입을 맞추려고 덤볐다는 것, 바로 길옆에는 바람에 휘청대는 보리밭이 있었고, 장소는 맞춤했지만 술 취한 그보다 그녀가 힘이 더 세었다고, 그쪽에서 떠미는 바람에 넘어졌고, 넘어졌어도 두 다리를 잡았다는 것, 그래서 그녀는 신데렐라처럼 구두만 남겼다고 한다.

 

- 황석영의 밥도둑

- 지은이 황석영

- 펴낸곳 (주)문학동네

- 초판3쇄 2016년 3월 22일

- p191 ~ 192

황석영의 밥도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