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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에서 선조의 통곡과 선조실록에 실린 이순신

산들행 2013. 1. 12. 08:51

성종릉과 정종릉은 임진년 가을에 파헤쳐졌다.

두 선왕릉이 파헤쳐진 사변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경기도사였다.

경기도사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류성용은 지체없이 명 육군 총병관 이여송의 군막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통곡했다.

류성용은 이어 만월대 정자 위로 올라가 능이 있는 남쪽을 향해 이마를 찧으며 통곡했다.

 

임금은 행재소 마당에 쓰러져 통곡했다.

임금은 성종묘와 중종묘가 있는 남쪽을 향해 통곡했고,

명의 천자가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했다.

임금은 울음의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오래오래 통곡했다.

방향을 바꿀 때 세번씩 절했다.

임금의 방향이 바뀔 때 마다 중신들은 대열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통곡했다.

이마를 땅에 찧고 주먹으로 땅을 치며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중신들은 통곡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08(개정판 25쇄 2009. 7. 28)

 

 

 임금은 자주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남쪽 바다에까지 들렸다.

 임금은 슬피 울었고, 오래오래 울었다.

 차고 푸른 해거름에 소복을 입은 임금은 동헌 마루에 쓰러져 울었다.

 의주까지 호종해서 따라온 중신들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임금은 깊이 울었다.

 임금은 버리고 떠난 종묘를 향해 남쪽으로 울었고 북경을 향해 울었고 해뜨는 동쪽을 향해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사무치게 울었다.

 아무도 임금의 울음을 말릴 수 없었다.

 강 건너로 지는 해가 마루 위로 도열한 중신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중신들은 임금의 울음이 스스로 추슬러질 때까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서울을 버릴 때 임금은 울었다.

 임진강을 건널 때 임금은 중신들을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개성을 버릴 때 울었고 평양에 닿았을 때 울었고 평양을 버릴 때 울었다.

 하삼도가 서로 내응해서 속히 창의의 군사를 휘몰고 올라오라는 교지를 써서 호남으로 보내고 나서 임금은 또 깊게 울었다.

 피난길 의주가 멀리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임금은 가마를 세우고 남쪽을 향해 또 길게 울었다.

 명나라 황제의 사신을 맞아 임금은 길게 울었다.

 신하들도 따라 울었다.

 임금은 흐느껴 울었고 중신들도 울었다.

명의 구원병이 압록강을 넘어왔을 때 임금은 강가에까지 마중나가 울었다.

 

 환도해서 임금은 종묘의 폐허에 나가 길고 구슬픈 울음을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기진하도록 슬피 울었고 길게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뼈가 녹아 흐르듯이 깊었다.

 

 임금의 언어는 장려했고 곡진했다.

 임금의 언어는 임금의 울음을 닮아 있었다.

 임금의 언어와 임금의 울음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임금은 울음과 언어로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임진년에 임금은 자주 울었고, 장려한 교서를 바다로 내려보냈으며, 울음과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날은 번뜩였다.

 그때 나는 임금의 언어와 울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24~231(개정판 25쇄 2009. 7. 28)

 

어전회의에서 임금(선조)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

어찌 이순신이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배를 거느리고 기세를 부리며 기슭으로 돌아다닐 뿐이다.

나라는 이제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적의 진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니,

이제 가토의 머리를 들고와도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이순신이 글자를 아는가?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이순신을 털끌만치도 용서해 줄 수 없다.

 

-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습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청컨데 잡아와 국문하여 죄상을 밝히시옵소서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승정원 비망기 1597년 3월 13일

이순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이제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좋을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418~420(개정판 25쇄 2009. 7. 28)

 

1598년 11월 19일 공의 나이 쉔넷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

이날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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