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감자

북유럽의 감자 전파 과정

산들행 2013. 7. 9. 00:10

16세기 말로 접어들 무렵 처음 유럽에 소개된 감자는 보급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대부분 유럽사람들은 감자에 대하여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문제는 유럽의 토양과 기후가 아니였다.

 

이유가 뭘까?

 

유럽사람들은그 이전에 덩이줄기를 먹어본 적이 없었고, 감자는 평판이 좋지 않았던 토마토와 마찬가지로 가지속 식물이었으며, 사람들은 감자가 나병과 방탕함을 야기한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어디에도 감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며, 감자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왔고 그곳의 미개한 원주민의 주식이었던 탓이다. 감자 먹기를 거부하던 사람들은 여러가지 다양한 핑계를 늘어놓았다.

 

아일랜드는 감자가 도입되자 이를 바로 받아들였다. 당시 아일랜드의 문화적, 정치적, 생물학적 환경은 이 새로운 식물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았다. 이 섬에서 곡류 재배는 극히 저조했고, 그나마 소규모 경작지도 영국 지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아일랜드 소작농들은 사실상 아무것도 재배할 수 없는 볼모의 땅에 감자를 심어 막대한 양의 식량을 일궈냈다. 이로써 17세기 말까지 감자는 유럽에서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이후 이백년이 안되어 북유럽을 휩쓸었다.

 

 

밀은 태양과 문명을 향해 위로 자라지만, 감자는 아래로 자란다. 감자는 탄수화물의 형태로 열량을 내는 것 외에도 상당한 양의 단백질과 비타민 B와 비타민 C를 공급했다. 감자는 재배하기도 쉬웠지만 요리하기는 더 쉬웠다. 다른 곡물에 비해 감자가 갖는 이점 덕택에 아일랜드 이외의 지역에서는 널리 재배 되기까지의 과정은 투쟁에 버금갈 정도였다. 

 

독일의 프레데릭 대제는 소작농에게 감자를 심으라고 강요했으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이 16세는 좀더 교묘한 방식을 썼다. 보잘것 없는 감자에다 왕실의 위엄을 부여하기만 한다면 소작농들이 시험삼아 감자를 심을 터이고 이내 그 가치를 인정하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에 늘 감자꽃을 꽂고 다녔고, 루이 16세는 감자를 보급할 묘안을 짜냈다. 그는 왕실 부지에 감자를 심도록 명하고는 자신의 최고 정예 호위대에게 낮동안 농작물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는 자정에 호위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왕실 감자의 가치를 확신하게 된 마을의 소작농들은 예상대로 밤 사이에 감자를 훔쳐 달아났고, 감자가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머지 않아 이 세나라는 감자 덕에 막강해졌다. 북유럽의 영양실조와 간헐적인 기아는 종식되었고, 다른 곡물을 심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먹고 살수 있었다. 감자는 경작에 인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탓에, 점점 비대해지고 산업화해 가는 북유럽 도시의 식량을 시골구석에서 모두 댈수 있게 되었다.  감자에 대한 편견이 마지막까지 존재했던 곳은 영국이었다.

 

 

 

- 욕망의 식물학

- 마이클 폴란 지음 이창신 옮김

- 펴낸곳 : (주)서울문화사

- 제1판 1쇄 발행일 2002년 1월 30일

- 값 12,000원

- p269 ~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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