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수수, 기장, 메밀

장자가 언급한 커다란 창고 안의 좁쌀

산들행 2015. 3. 26. 17:32

장자의 추수(秋水)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다의 신인 약()이 말하지요.

 

내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마치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가 큰 산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토록 왜소한 존재가 어떻게 스스로를 뛰어나다고 여기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사해(四海)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개미집 구멍이 큰 연못 속에 있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또한 중국이 사해 안에 있는 것은 커다란 창고 안에 좁쌀이 있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커다란 창고 안의 좁쌀(클 대 창고 창 돌피 제 쌀 미, 대창제미)’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당시에 장자가 말하는 커다란 창고는 사해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우주를 가지고 말한다면 이 지구도 작은 점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이라면 우리가 큰 것과 작은 것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큰 것 밖에 더 큰 것이 있고, 작은 것 안에 더 작은 것이 있어서 이 두 가지 방향은 모두 무한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판단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큼과 작음은 상대적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물의 귀천도 상대적이라는 점입니다.

 

 

미국의 작가인 소로(H. D. Thoreau)가 쓴 월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호숫가 근처에서 22개월 동안 혼자 살면서 얻은 마음의 깨달음을 적고 있습니다. 소로는 호반에 혼자 살면서 자연스럽게 부근 농민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지요.

 

당신은 여기에 혼자서 사니 매우 적막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특히 비가 내리는 날이나 깊은 밤에는 더욱 그럴 것 같은데,,,”

 

그때 소로는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이 우주에서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 상상해보세요. 지구 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 거리가 멀면 또 얼마나 멀겠습니까. 근데 왜 제가 적막하다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커다란 창고 안의 좁쌀이라는 비유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모든 생명 본래의 면모, 그 자체를 감상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지구가 하나의 좁쌀처럼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저 좁쌀 위에 함께 사는 만물을 어째서 꼭 귀함과 천함, 높음과 낮음,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싫음 등을 따지며 구별하는 것일까요.

 

소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들판의 수탉이 나무 위에서 우는데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몇리 밖에서도 모두 들을 수 있었고, 그러자 대지는 진동했다. 이것이 온 나라를 일깨울 수도 있다.....” “ 황혼 녘 먼 지평선 위에 우는 소가 있다. 숲 속에 전해지는 소리는 감미롭고 선율도 우아하다. 나는 처음엔 그것을 유랑시인의 노랫소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것들은 모두 대자연의 소리였다!”

소로의 책에서 가장 빼어난 부분은 작은 생명체에 대한 그의 찬미입니다.

 

커다란 창고의 좁쌀이라는 비유부터 사물의 귀함과 천함이 없다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내용은 우리에게 소극적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말라거나 자신의 직분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내면의 편견이나 집착 혹은 고정관념을 버리기를 장자는 바라고 있습니다. 크고 작음 또는 귀함과 천함을 함부로 분별하면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도 곤란과 고통을 가져올 따름입니다.

 


- 장자 교양 강의

- 푸페이룽 지음/신의용 옮김

- 펴낸곳 돌베개

- 2014121일 초판 5쇄 발행

- p39 - 50

장자 교양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