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물일반

노예제의 발단은 사탕수수 때문이었다.

산들행 2017. 6. 8. 11:18

노예제의 발단은 고추와는 반대 방향으로 유럽인들이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가져온 작물인 사탕수수였다. 사실 사탕수수는 열대 뉴기니가 고향이며 위도가 높은 유럽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세 유럽인들에게 설탕은 매우 귀한 대상이었고 고가품이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되었다.


먼저 포르투칼인은 서아프리카로 항해를 거듭하면서 서아프리카의 난바다 쪽에 떠 있는 마데이라 제도(Madeira Islands), 카보베르데 제도(Cabo Verde islands), 기니 만에 있는 상투메(Sao Tome)섬을 비롯한 많은 섬들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들 섬에서도 사탕수수가 매우 잘 자랐기 때문에 기존의 지중해에서 재배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저렴한 비용으로 설탕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도 아프리카 서해안 난바다에 있는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콜럼버스도 2차 항해 때 사탕수수를 배에 싣고 가서 카리브해의 산토도밍고에서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했다. 이윽고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산토도밍고에서 뿐만아니라 쿠바, 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 등 대앤틸리스 제도(Greater Anntilles)로도 연달아 사탕수수를 들여와 재배를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스페인에서 설탕 생산의 주도권을 쥐었으나 언제부턴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제국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방식의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생산은 애초에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바로 심각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유럽인의 침략으로 원주민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 일행을 비롯한 유럽인과의 전투, 그로 인한 원주민의 노예화와 학대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원인은 유럽인이 초래한 역병이었다. 특히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등의 질병이 아무런 저항력도 없는 원주민을 덮치면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노예로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했다. 이미 1503년부터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강제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설탕 열풍이 불면서 아프리카에서 끌려오는 노예의 수도 급증했다. 현재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필립 거틴(Philip D. Curtin)의 연구에 따르면 1451년부터 1870년까지 420년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간 노예는 약 94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듯 아프리카로부터 수많은 노예들이 카리브해의 여러 섬을 비롯해 열대권에 위치한 대서양안의 라틴아메리카 각지로 유입되었다. 이처럼 아프리카 서해안과 남아메리카 동해안은 16세기 초부터 노예무역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 페퍼로드

- 야마모토 노리오 지음 / 최용우 옮김

- 펴낸곳 (주)사계출판사

- 2017년 5월 26일 1판 1쇄

-  p104-107

- 값 1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