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밀, 기타 맥류

식품과 정치의 관계로 본 빵과 프랑스 혁명

산들행 2018. 2. 13. 13:51

식품과 정치의 관계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로마의 '빵과 서커스 정치' 그리고 미국의 '차와 독립전쟁' 외에도 '빵과 프랑스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하면 "빵"을 연상할 만큼 프랑스 요리와 문화에서 빵은 상징적일뿐 아니라 그들의 주식이니 실제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옛날 프랑스 사람들은 빵을 굽는 제빵사의 오븐을 국가 전체의 자궁으로 믿고, 호모를 일종의 정액으로, 빵(바게트)은 남근으로 믿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빵을 굽는 일은 신성한 일이었다. 그래서 빵을 굽는 직업을 독실한 가톨릭신자에게 제한하였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빵은 국가가 제공하는 공공서비스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프랑스 시민들은 거칠고 딱딱한 갈색빵(호밀빵과 보리빵)을 먹고 살았다. 귀족들은 밀로 만든 부드럽고 맛있는 빵만을 먹었다. 누군 흰빵 먹고, 누군 갈색빵을 먹느냐의 문제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과민한 정치적 문제의 하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빵 가게 주인이 어린 소년에게 호밀빵을 흰빵값으로 속여 판 사건이 생겼다. 호밀빵 먹는 것도 화가 날 일인데 그마저 값을 속인 데에 대해 분개한 동네 아낙들은 빵집 주인을 붙들어 연못에 빠뜨렸고, 이 일은 점차 규모가 커져 이웃마을로 전해지고 결국 폭등으로 변하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빵사건으로 보이던 이 사태는 파리를 향해 번져갔다. 파리에 도착한 폭도들은 당시 재정부 장관 사무실 앞에서 외쳤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 그러나 더욱 정확한 그들의 속마음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옳을 것 같다. "우리에게 바삭하고 노릇노릇한 색의 껍질에, 속은 부드러운 맛있는 빵을 합당한 가격에 달라." 즉 그들은 차별이 없는 빵을 원한 것이다. 그러나 절대군주의 상징이자 당시 왕이던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nette 왕비는 철없이(?) 그들이 자신들의 빵에 그렇게 불만족한다면 그들에게 케이크를 먹으라고 제안하였다. 왕과 왕비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프랑스 시민혁명의 발달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지만 위와 같은 이야기는 빵의 역사를 통해 본 프랑스 시민혁명의 발단이다. 결국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 사람들은 권력이 있건 없건, 부자건 가난하건 누구나 똑같은 품질의 빵을 사 먹을수 있는 권리를 실현했다.


프랑스 시민혁명이 있을 후, 의회는 평등의 빵을 만들기로 하였다. 밀 3과 호밀 1의 비율로 빵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지금도 바게트는 무게와 가격을 정부에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이렇듯 프랑스인들에게 있어서 '빵'은 역사의 굵은 획이 되기도 하고, 세계적인 문호와 명작의 소재가 될 만큼 단지 먹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음식패설

- 지은이 김정희

- 펴낸곳 채륜

- 1판 1쇄 펴낸날 2017년 1월 20일

- p180 ~182

음식패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