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밥하면 늘 가난이 떠오른다. 춘궁기와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민초들의 궁핍함과 빈곤함에 유일한 위안으로 보리밥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리밥마저..."라는 말은 삶이 생과 사의 경계에 도달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런 비장함과 절박함이 절절히 배어났던 보리밥이 최근 들어 별미 대접을 받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별미로서의 시작은 웰빙 등 건강 열풍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보리밥 한 그릇이면 식이섬유 1일 권장량을 너끈히 채울 수 있으며 섬유소가 쌀에 비해 10배 이상 높아 포만감을 줌으로 다이어트에 그만이다. 더불어 껍질의 베타글루칸 성분은 당뇨병에 좋고 고혈압의 원인이 되는 콜레스테롤을 낮춰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 암 예방과 심장질환 예방 등등 수없이 많은 이점을 갖고 있는 음식이 바로 보리밥인 것이다. 한방으로 따지면 보리밥의 찬 성질은 여름 더위를 식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여러모로 여름에 즐겨 찾을 만한 맛이 보리밥이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강된장 듬뿍 퍼담고 사각사각 채소와 함께 비벼 미끄덩 보리밥 입 안 가득 넣으면 입에서 보리피리 소리가 들린다.
전라남도 승주에 위치한 선암사는 태고종 본산이다. 불교신자가 아니여도 이곳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먼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 승선교 때문이다. 승선교의 여운은 토종야생차 한잔으로 마무리하면 좋다. 경내의 다양한 수목들 중 선암매와 홍매는 단연 으뜸이며 시인 정호승의 시 '선암사'에 나오는 해우소는 문화재급으로 칭송할 만하다.
경내가 지루할 즈음 조계산 등산로로 눈길을 돌리자. 산행의 목적지는 등산객이든 관광객이든 큰굴목이재가 적당하다. 선암사와 송광사 중간에 위치한 큰굴목이재가 특별한 이유는 1979년 무렵 제대와 동시에 터를 잡은 최석두 씨가 운영하는 원 보리밥집 때문이다.
조계산의 모든 등산로는 이 보리밥집으로 모여 다시 흩어진다. 최 씨는 그의 아내, 딸과 함께 여전히 터를 지키며 그의 미소와 어울리는 보리밥상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고 있다. 단골 중에는 스님들도 있다고 하니 조계종과 태고종 화합의 상징적인 존재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산자락에서 열무김치와 각종 나물을 얻고 고추장으로 보리밥 쓱쓱 비벼 동동주 한 잔과 함게한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지나가는 바람에 방구 한번 시원하게 날려주면 이 또한 찰나의 해탈이 아닐런지. 취기가 살짝 돌면 평상에 누워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면 그만이다. 이것이 바로 원 보리밥집만의 특별한 맛이다.
-식객 2 1 그리움을 맞보다
- 취재 글 그림 허영만
- 펴낸곳 가디언
- 1판 10쇄 발행 2017년 9원 11일
- p270~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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