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밀 재배량은 쌀에 비하여 적은 편이었다. 밀은 고온에 약하기 때문에 평균기온이 4℃ 내외이며 여름철에도 평균기온이 14℃를 넘지 않는 지역에서 잘 자란다. 그래서 여름 기온이 이보다 높고 기온의 연교차가 큰 우리나라에서는 주된 식량작물로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못했다. 대신 밀은 벼를 수확한 10월 말경 빈 경작지에 파종한 뒤, 모내기를 하기 전인 6월 하순경에 수확하는 이모작 작물로 선택되곤 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약 22종의 밀이 재배된다. 어떤 지역에서 어느 밀이 잘 자랄지 결정하는 것은 밀이 가진 우수성이 아니라 강수량이다. 강수량이 적고 기온이 비교적 서늘한 지역에서는 경질(硬質)밀류가 잘 자라며, 강수량이 많고 기후가 비교적 온화한 지역에서는 연질(軟質)밀류가 잘 자라기 때문이다. 경질밀과 연질밀을 가르는 기준은 밀알 속에 포함된 단백질의 양인데 단백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면 경질밀, 적게 포함되어 있으면 연질밀로 나뉜다.
밀 알은 크게 낟알로 둘러싼 껍질(15%)과 씨눈(2%)과 밀이 싹 틀 때 필요한 영양분이 되는 배젖(83%),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도정한 뒤 그대로 밥을 지어 먹는 쌀과는 달리 밀은 낟알 그대로가 아니라 가루를 내어 먹는다. 그 이유는 알맹이의 경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쌀은 알갱이가 비교적 단단해 사과 껍질을 벗기듯 알맹이는 그대로 두고 껍질을 깎아 벗기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밀알은 경도가 약해서 껍질을 벗기는 과정에서 부서져 버린다. 따라서 밀은 도정 대신 제분기로 분쇄하여 가루를 만드는 제분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잘게 부순 통밀가루를 체에 내리면 밀 껍질인 밀기울이 걸러진다. 고운 밀가루를 얻기 위해서는 밀알을 잘게 부수고 눈이 고운 체로 여러 번 걸러줘야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밀기울과 씨눈이 제거되고 배젖만으로 구성된 가루가 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밀가루이다.
밀을 다른 곡식과 다르게 특징짓는 단백질이 바로 '글루텐(gluten)'이다. 순수한 글루텐은 물에 녹지 않는 불용성 물질로, 밀가루의 흰색과는 달리 회색빛을 띤다. 사실 막 제분한 밀가루 속에는 글루텐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대신 글루테닌(glutenin)과 글리아딘(gliadin)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는데, 밀가루에 물을 넣고 반죽하면 글루테닌과 글리아딘이 결합하면서 글루텐이 만들어진다. 글루테닌은 탄력성이 있고, 글리아딘은 점성과 신장성이 있으므로 이 둘이 합쳐진 글루텐은 탄력성·점성·신장성을 모두 갖추게 된다. 따라서 잘 반죽한 밀가루 속의 글루텐은 끈적끈적하고 질긴 그물 모양의 구조를 형성한다. 밀가루 반죽을 수십 번 늘이고 접어서 '수타면'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이 글루텐이 그만큼 질기고 잘 늘어나기 때문이다.
쌀가루로 만든 반죽은 글루텐 성분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밀가루 반죽처럼 질기고 쫀득한 반죽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쌀가루로 반죽을 만들 때는 찬물이 아닌 뜨거운 물을 넣어 반죽하는 '익반죽'을 해야 하는데, 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넣고 치대면 녹말이 호화되면서 끈적해지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익반죽을 한다고 해도 쌀가루 반죽은 글루텐이 든 밀가루 반죽에 비해 점성과 신장성이 현격히 떨어지게 마련이다.
- 하라하라의 음식과학 - 지은이 이은희 - 펴낸곳 (주)살림출판사 - 초판 6쇄 2017년 6월 28일 - 122 ~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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