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순조의 인릉과 태종의 헌릉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주변에 있다. 인헌릉은 국가정보원과 가까이 있었다.
인릉과 헌릉의 안내도이다. 인릉은 조선 23대 왕 순조와 순원황후의 능이고, 헌릉은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다. 인릉과 헌릉은 작은 영역에 가까이 위치해 있어 잠시 돌아보기에 좋다.
태종은 형제들과 골육상쟁을 벌이면서까지 투쟁하여 왕위를 쟁취한 인물이다. 또한 처남 셋을 죽이고 세종의 장인을 사형시키는 등, 처가와 며느리 집안 등 외척의 발호를 제압한 왕이다. 그 덕분에 세종은 외척에 휘둘리지 않고 왕권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었다. 태종은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자 관제 개혁, 사병 혁파, 군사 제도 개편, 조세 제도 정비 등을 통하여 조선의 기틀을 만든 왕이다. 그에 비하여 왕릉의 기세는 조금 부족하다.
순조의 인릉이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이다. 11세에 왕위에 올랐고, 영조의 두번째 왕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하였으며, 순조 때 세도정치로 국가 기강이 문란해졌다. 하여튼 외척이나 권력자들은 잠시만 틈을 보이면 국가를 농락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는다.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한눈에 보인다. 오른쪽은 헌릉으로 가는 길이다.
인릉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두개이고 각기 모양이 다르며, 그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신분도 한정되어 있다. 헌릉의 정자각 계단과 비교하면 화려한 것이다.
인릉의 비각이다.
인릉에는 신 비문과 구 비문 두개가 있다.
인릉 신 비문은 '대한 순조숙황제인릉'이라고 쓰여 있고, 구 비문에는 '조선국 순조대왕 인릉순원왕후 부좌'라고 쓰여 있다. 왕이 황제로, 왕후가 황후로 격상되었으니 비문을 새로 작성하여 세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릉을 지나 헌릉으로 가는 산책로는 한적하고 짧은 편이다. 숲은 울창하지도 않지만 초라하지도 않다. 왕릉은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는데 소나무 이외에 참나무도 많이 보인다. 왕릉이 오래되었으니 침엽수에서 활엽수로 우점종이 바뀌는 중이다.
헌릉은 조선 제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이다. 홍살문이 보이고, 향로(香路)인지 어로(御路)인지 진입로는 하나만 있다. 인릉은 향로와 어로 두개인데 헌릉은 하나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산 자의 영역이고, 정자각에서 왕릉까지는 죽은 자의 영역이다.
정자각이다. 정자각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곳이다.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은 3계단으로 인릉 5계단에 비하여 초라한 편이다. 태종의 권세는 강하고 순조의 권세는 약한데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은 그 반대라서 좀 의아하다.
멀리 죽은 자의 영역에 쌍릉이 보인다. 그리고 죽은 자가 다니는 신로(神路)가 능침 영역으로 뻗어 있다. 능침 영역으로 가는 길은 높이 가파르니 누구도 들어갈 수 없고, 그 양옆으로 소나무가 도열해 풍수의 지기를 보호하고 있다. 그래서 도래솔이라 한다.
신로에서 본 정자각 모습, 향로와 어로는 돌 길인데 신로는 잔디 길이다.
헌릉은 쌍릉이다. 헌릉은 남한에 있는 왕릉 중 문인석, 무인석, 석양(돌로 만든 양), 석호(돌호랑이) 등 석물이 다른 왕릉에 비하여 두배가 많다. 세종이 대모산에 산역한 능이다.
헌릉은 인릉에 비하여, 강력했던 태종의 이미지에 비하여 조금은 초라하지만 석물은 강하고 웅대하다.
헌릉 비각에는 두개의 신도비가 있다. 하나는 세종대왕이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숙종이 다시 세운 것이다. 신도비는 태종 이방원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왼쪽 사진은 숙종이 세운 신도비의 거북이 좌대이다. 그리고 세종 때 신도비와 숙종 때 신도비가 나란히 보인다.
헌릉의 정자각과 비각이 보이고, 가까이에 석물 하나가 보인다. 아마 축문을 소지하는(태우는) 곳일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인릉과 헌릉으로 가는 길에서 본 재실이다. 재실(齋室)은 제관들이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시에는 능을 돌보는 참봉이 기거하였다. 지금은 닫혀 있었다.
재실 대문은 잠겨 있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대문 밑으로 들이 밀어서 찍은 사진이다. 빈집이다.
인릉과 헌릉의 주차장 왼쪽은 인적도 없이 삼엄하다. 국정원이기 때문이다. 기관명이나 안내판도 없다.
버스를 타고 인헌릉으로 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화원 단지이다. 그리고 왕릉은 소나무가 적고 참나무류가 우점하였다. 참나무에는 사슴벌레가 살고 있었다.
왕릉 하나에 소요되는 관리비용을 충당하려면 전답이 80결(1결은 3천평)이 필요하고, 능은 일반인이 얼씬도 못하는 금지구역 이었다. 왕릉은 풍수지리 지식이 집대성된 곳으로, 당시의 풍수란 왕과 사대부에 국한되어 소수만 알고 있던 사항이었다. 왕릉을 제외한 묘는 무조껀 5척(1.5m) 이하로 묻으라는 국법이 있었고, 왕릉은 10척(3m) 깊이로 묻었다. 왕족이나 대신들이 이 풍수를 어길 시에는 후대의 발복으로 역모를 꾸미는 것이기에 삼족을 멸족시켰다. 왕은 깊게 묻혀 지기를 자손대대로 발복하게 하고, 왕이 아닌 사람은 얇게 묻어 역성혁명을 꾸미지 않되 집안의 부흥을 도모해야 한다.
역사를 배우고 유적은 안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곳들을 유념하고 있다가 기회가 될 때 찾아가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것이 그곳에서 살아 있는 역사를 음미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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