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재배하는 여러 농작물 중 곡물은 배를 든든히 채워주는 매우 중요한 작물이다. 주식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주로 재배하는 것이 다르기는 하지만 곡물은 다른 어떤 작물보다도 중요시 되는 작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이러한 곡물 사이에도 엄연한 신분 차이가 존재한다. 맨 윗자리는 벼와 보리가 차지하고 있는데 이 둘은 밥을 지을 수 있는 곡물이다. 둘 중에서 으뜸은 벼이고 부족할 때 보리를 섞는다. 밀은 가루를 내어 가공을 하니 밥이 될 수 없고 다른 것들은 밥을 지을 때 섞을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밥을 짓지는 않는다.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일컬을 때 '숙맥 菽麥' 이라고 한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콩 菽'과 '보리 麥'인데 콩인지 보리인지 분별하지 못한다는 뜻의 '숙맥불변 菽麥不辨'에서 온 것이다. 웬만한 바보가 아니고서야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할 리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콩과 보리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쌀'과 '쌀 아닌 것'의 구별뿐이다. 그래서 쌀이 아닌 것은 모두 잡스러운 곡물, 즉 '잡곡 雜穀'으로 불린다.
사전에서 잡곡은 보리, 밀, 콩, 팥, 옥수수, 수수, 기장 등 쌀 이외의 모든 곡식을 뜻한다. 잡곡의 반대말을 억지로 만들자면 '순곡 純穀'인데 사전에 올라 있지도 않고 일상에서도 잘 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잡곡의 뜻풀이에 기대어보면 '순곡'은 당연히 쌀이고, '잡곡'은 그것이 지시하는 곡식을 낮추는 말이라기보다는 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리와 밀은 좀 억울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에서 보리는 다른 잡곡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중이 높다. 보리는 쌀과 함께 밥을 지을 수 있다. 부족한 쌀을 보충하기 위해 쌀에 섞는 것이 보리고, 쌀이 떨어질 무렵 오롯이 쌀을 대신하던 것이 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럽게 잡곡 취급을 받는다. 밀도 마찬가지다. 밀을 주식으로 삼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걸쳐 있는데도 우리에게는 그저 잡곡일 뿐이다.
콩과 팥 그리고 옥수수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콩은 중요한 식물성 단백질 공급원이자 두부의 재료가 된다. 스스로 질소를 고정해 양분으로 사용하므로 거름을 따로 줄 필요도 없고 재배하고 나면 지력도 향상되는 효과가 있다. 옥수수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 고산지대나 건조 지역의 주요 작물이다. 오로지 쌀만을 순곡, 혹은 주곡으로 여기는 곳에서는 옥수수가 잡곡일지 몰라도 옥수수만 자라는 지역에서는 옥수수가 황금보다도 더 귀한 곡식이다.
- 우리 음식의 언어
- 한성우 지음
- 발행처 도서출판 어크로스
- 초판 5쇄 발행 2017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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