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까지는 없어서 못 먹던 쌀을 양껏 먹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면 그 뒤에는 쌀에 대한 갈망을 풀었으니 다른 것을 먹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졌다. 이와 같은 욕구의 다변화는 국민소득의 성장과 더불어 그 속도가 빨라졌다. 이렇게 쌀이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흔들리는 가운데, 밀의 위상도 서서히 변화해왔다. 밀에 대한 기억은 크게 두 갈래로 형성되어 나갔다. 한편으로는 쌀의 열등한 대체재로, 다른 한편으로는 쌀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범주인 '양식'으로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자기 자리를 점해나갔다.
한반도에 자생 밀은 있었다. 뒷날 멕시코와 인도의 녹색혁명을 이끈 '난쟁이 밀'의 육종 재료로 노먼 볼로그가 이용한 반왜성 밀 '노린(農林10호'는 일제강점기 수집된 한반도 '앉은뱅이 밀'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밀농사의 최적지는 아니다. 특히 중부이남 사람들에세 밀은 손쉽게 구하기 어려운 곡식이었다. 경상도 제사상에는 밀국수가 오르는데, 이는 밀이 그만큼 귀한 별미로 대접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인에게 밀은 진귀한 별미보다는 쌀의 부족을 가리기 위한 값싼 대체재라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미국으로부터 다량의 밀가루 원조를 받게 되면서, 한국 정부는 쌀 부족과 가격 변동을 값싸게 수입한 밀가루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인이 밀가루 음식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서양식 빵을 보급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빵은 식사로서의 '밥'에 대한 한국인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음식이었고 끼니보다는 간식으로 받아들려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지면이나 광고를 통해 국수나 빵으로 한끼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선전했다. 또 '분식의 날'을 정하여 일반 식당에서는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분식만을 팔게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분식 권장의 결과 한국인이 식사로 인정하는 분식 메뉴가 하나둘씩 생겨나게 되었다. 면류를 많이 취급하는 중국음식점은 분식 권장정책의 혜택을 입은 업종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짜장면은 분식 장려정책과 맞물려 저렴한 한끼 식사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또한 인스턴트라면도 이 시기 한국 시장에 선을 보여 큰 인기를 끌었다. 이윽고 일본식 닭고기 스프에서 벗어나 쇠고기 스프에 매운 맛을 더해 한국인의 입맛에 맞춘 라면을 생산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꾸준한 국가의 장려에도 불구하고, 분식집은 식생활 개선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오늘날 분식집이라고 하면 그저 싸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곳을 뜻하게 되었다. 심지어 분식집의 메뉴에서 분식이 주인공도 아니다. 분식집 메뉴에는 라면과 함께 된장찌게 백반이나 순두부 백반과 같은 싸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밥과 반찬 종류가 나란히 적혀 있다. 이처럼 한식화된 분식으로 한식을 개선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한식의 틀 안에서 분식은 밥의 열등한 대체재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밀가루 음식의 위상이 올라간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서이다. 즉 쌀로 만드는 한국음식에서 쌀만 밀가루로 바꾸면 열등한 대체재가 되지만, 처음부터 밀가루로 만들게 되어 있는 서양음식은 밥의 열등한 대체재가 아니라 전혀 다른 범주의 음식, 즉 서양 문화로, 배워야 할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980년대 말 햄버거와 피자 프랜차이즈가 대도시의 젊은이와 어린이를 중심으로 조금씩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스파게티를 필두로 파스타도 1990년대부터는 조금씩 세력을 넓혀갔다. 한국의 피자는 1980년대 초반까지는 미군부대 주변이나 고급 이탈리아 식당 등에서 제한적으로 소비되는 특이한 음식으로 인식되었으나, 1985년 미국의 다국적 프랜차이즈 피자헛(Pizza Hur)이 이태원에 점포를 열면서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1988 서울올림픽과 이듬해의 해외여행 자유화 등을 계기로 서양식 요리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면서 피자와 파스타 등은 빠른 속도로 대중화되었다. 1990년대 말이 되면 파스타나 피자는 완전히 한국의 외식사장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밥 대신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을 제쳐두고 먹어봐야 하는 우월한 서구 문화의 일부로 들어왔다. 따라서 칼국수나 만두가 밥보다 비싼 일은 용납되지 않았던데 비해 햄버거 세트나 파스타는 손쉽게 밥보다 높은 값을 받고 팔릴 수 있었다. 한국인에게 여전히 낯선 음식이었던 빵도 차츰 저변을 넓혀갔다.
그 결과 밀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은 1970년 13.8킬로그램에서 2011년에는 35킬로그램까지 증가하여 쌀의 절반에 육박했다. 게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로 밀, 육류, 과채, 낙농품 등의 소비가 크게 증가한 결과,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더 이상 한국인의 유일한 주식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쌀이 식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다.
-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 김태호 지음
- 펴낸곳 도서출판 들녘
- 초판 1쇄 발행일 2017년 4월 25일
- p262 ~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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