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에서 빛은 사람을 찌를 듯이 달려들지 않는다.
나뭇잎 사이로 걸러지는 빛은 숲의 대기 속으로 스며들고,
밝음과 어둠의 구획을 쓰다듬어서 녹여버린다.
스며서 쓰다듬는 빛이 나무와 나무 사이로 가득 내려쌓여 숲은 서늘한 음영에 잠긴다.
숲속의 빛은 물러서듯이 멀어지고,
멀어지면서 또 깊어져서 더 먼 빛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간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나무들은 뚝뚝 떨어져서 자리 잡고,
그렇게 떨어진 자리에서 높아지는데,
이 존엄하고 싱그러운 개별성을 다 합쳐가면서 숲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개별적인 존재의 존엄으로 우뚝하고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들은
다툼이 아니라 평화의 모습으로 서늘하다.
나무들의 숲은 그 나무 사이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낯선 시간들의 순결로 신성하다.
숲의 힘은 노래된 것들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이어서
숲속에서 시간은 낡지 않고 시간은 병들지 않는다.
숲은 모두를 끌어안는 그 고요함으로서 신성하다.
아마도 숲이 사람을 새롭게 해줄 수 있는 까닭은
숲에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숲이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5월의 숲은 온 천지의 엽록소들이 일제히 기쁨의 함성을 지르듯이 피어난다.
나무들은 제 본래의 색으로 피어나 숲을 이루고,
숲들은 제 본래의 색으로 산을 이루어,
산은 초록의 모든 종족들은 다 끌어안고서 구름처럼 부풀어 있다.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들의 시간이다.
5월의 산에서 가장 자지러지게 기뻐하는 숲은 자작나무숲이다.
하얀 나뭇가지에서 파스텔톤의 연두색 새잎들이 돋아날 때
온 산에 푸른 축복이 넘친다.
자작나무숲은 생명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은 바람에도 늘 흔들린다.
잎들은 태어나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거리면서 반짝인다.
숲의 빛은 바다의 물비늘처럼 명멸한다.
오리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 숲들의 신록은 거칠게 싱싱하다.
그 숲의 이파리들은 아름다움의 정교한 치장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고
여름의 검푸른 초록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이 숲은 봄의 현란함이 아니라
여름의 무성함속에서 완성되는 넓고 힘센 활엽수들의 숲이다.
소나무는 새잎이 날 때부터 이미 강건한 초록색이여서
소나무숲은 봄에도 연두의 애잔함이 없다.
이렇듯 상록수의 숲은 짙고 깊게 푸르러서
겨울을 어려워하지 않는 엄정함으로 봄빛에 들뜨지 않는다.
그러나 온 산이 화사한 활엽수들의 신록으로 피어날 때
연두의 바닷속에 섬처럼 들어앉은 상록수의 숲은 더욱 우뚝하다.
숲의 아름다움은 아직 멀고, 갈 수 없는 숲을 바라다보고만 있다.
새잎이 돋는 사태 속에서 그저 산이나 쳐다보고 앉아 있어도 좋다.
- 글의 출처 : 김훈, 자전거 여행에서 -
설앵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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