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것이 귀하기도 했지만 보리와 달리 밀은 불에 익히면 알이 쉽게 빠지기 때문에 밀서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서리'라는 말은 '주인 모르게'라는 뜻이 있어서 요즘 세상엔 '도둑질'에 속하는 말인데, 그때는 들키지만 않으면 죄인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멀리서 밭주인이 달려오면, 아이들이 야단 맞을까봐 도망치고, 주인이 안 보일 때까지 숨이 턱에 닿도록 뛰다가 서로 검댕이 묻은 얼굴을 마주 보고 킬킬대고.......
밀서리는 내 밭에서 만들어도 '밀서리'라는 말을 썼다. 밭 가운데 있는 밀이 누렇게 익어가도 밀밭의 가장자리에는 녹색으로 덜 여문 것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것들을 베어다가 모닥불에 그슬려서 키에다 대고 문지르고 까부르셨다. 그러면 투명한 구슬처럼 생긴 초록색 밀알이 탱글탱글하게 모아졌는데, 한줌씩 입에 넣고 씹으면 쫀득쫀득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먹을 거리는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그리고 사람과 시간을 연결해 주고 그 관계의 소중함과 함께 그 사이에 숨어있는 정을 느끼게 해주는 대화인 듯하다.
이처럼 음식을 통해서 사람을 기억할 수 있고 그와 함께 했던 추억으로 행복할 수 있는 건, 음식이라는 것이 사람을 위한 정성이고 배려고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 옛날 사람처럼 먹어라
- 권오분 지음
- 도서출판 마음의 숲
- 1판 1쇄 2007년 9월 15일
- p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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