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는 2년에 걸친 농사였다. 늦가을에 파종하여 이듬해 봄에 수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리는 겨울잠을 자는 곰이나 개구리같이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소생과 부활을 상징하는 곡식이었다. 겨울에는 많은 눈이 내려 밭고랑이 깊게 묻힐수록 좋고, 이듬해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면 뿌리가 들뜨지 않도록 밟아주는 고난을 겪어야만 오히려 잘 자라는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보리가 자라서 수확하는 중에 농군들은 소문의 벽에 갇혀있던 마을의 염문 사건들을 사실로 확인하기도 한다. 보리밭 한가운데 한두 군데에서 필경 사람이 숨어들어 뒹굴다가 떠난 흔적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어느 집 과부와 외지에서 흘러 들어온 건달, 혹은 어느 댁 총각과 처녀가 뜨거운 눈길을 주고 받으며 살갑게 지내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나 긴가민가했다. 그런데 보리밭 한 가운데 드러난 뚜렷한 흔적을 발견하면서 비로소 소문을 사실로 확인하는 것이다.
사오월에 꽃이 핀 보리밭으로 들어가면 그 까그라기가 몹시 성가신데도 보리밭 속에 몸을 숨기고 사랑을 벌이는 원초적 기원은, 수확이 많기를 기원하는 고대의 의식에 유래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사방이 시야가 환하게 트인 들판에서 남의 시선을 호젓하게 피할 수 있는 피신처로선 그 소년의 키 꼴로 자란 보리밭 속이 제격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보리는 우리들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는 서정과 정욕을 듬뿍듬뿍 들춰낸다. 겨우내 추위에 떨다가 훈풍이 불어오는 6월이면 보리의 푸름은 하루가 다르게 햇살 가득한 들녘을 가득가득 채워준다. 그리고 멀리 서쪽 들판에서 하늬바람이 불어오는 날, 보리는 몸 전체로 일어서며 바람결을 따라 마치 외르르 쏟아지는 듯하면서도 유장하게 흐르는 강 여울처럼 매혹적인 몸짓으로 떠밀고 떠밀리며 흐느적 거린다. 바람에 비끼는 보리의 군무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려면, 흡사 속살이 비치는 자리옷을 걸친 여인의 유혹적인 춤사위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보리는 어느덧 바람과 얼싸안고 저희들끼리 울고 있다.
보리를 베어내기 전 그 장소에서 까그라기에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매몰스럽게 거절하면 그만 등 돌리고 떠나버릴까 차마 두려웠다. 그만 허락하고 정사를 나누었던 그녀는 보리를 베어낸 후에 비로소 임신했다는 것을 가슴 철렁 내려앉게 깨닫는다. 불장난 저지른 것을 참담한 심정으로 후회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 지난날 그대로 돌이킬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심은 벼가 자라고 있는 논두렁에 밤중에 몰래 찾아와 대성통곡으로 눈물을 짜낸다.
하지만 평생 헤어지지 말자는 언약을 두 번 세 번 다짐하고 몸을 허락했던 사내녀석은 이미 새처럼 날아가버리고 곁에 있지 않다. 그녀는 꼬깃꼬깃 모아 염소 똥같이 짜고 소중한 돈을 꾸려 대처로 무면허 산부인과를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다.
안면도에서 열린 꽃 박람회에선 가장 심하게 훼손된 곳이 보리밭이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가 이구동성으로 고혹적이고 아름답다거나 혹은 탐스럽다고 표현하는 그 현란한 배경들을 마다하고 하필이면, 많은 사람들이 보리밭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을까. 그것은 보리의 생명력처럼 닥친 고난에 쉽게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던 지난날의 애옥살이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일깨워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젖은 신발
- 김주영 산문집
- 발행처 : 김영사
- 1판 5쇄 발행 2003. 9. 30
- p186~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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