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쌀

통일벼 밥맛과 노풍벼의 오명

산들행 2013. 7. 6. 23:53

통일벼 이야기를 하려면 세 명의 주역을 꼽아야 할 것이다. 먼저 개발자인 서울농대 허문회 교수가 있고, 두 번째로 무려 12년간 농촌진흥청장으로 있으면서 통일벼의 보급과 증산 시스템의 구축과 운영을 책임진 김인환 농촌진흥청장,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

 

통일벼는 푸석푸석하고 차진 맛이 적어 일반미에 비해 밥맛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밥상 시식회에 참석해 이런 밥맛 시비를 잠재웠다. 통일벼가 개발된 뒤 열린 시식 겸 평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무기명으로 작성하게 된 설문지의 밥맛 평가란에 ‘좋다’에 동그라미를 치고 크게 자기 이름을 적어 넣었다. 누구도 통일벼 밥맛을 거론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통일벼의 또다른 문제는 재배법이 까다롭다는 점이다. 기존의 자포니카 품종은 전통적인 물못자리에서 모를 키웠지만, 통일벼는 비닐로 덮은 보온 못자리에서 모를 키워야 냉해를 막을 수 있다. 통일벼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자포니카에 비해 37퍼센트나 높았다. 통일벼는 맛이 없어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떨어졌지만, 정부는 추곡수매와 이중곡가제를 통하여 통일벼 재배 농가에 확실한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1974년에는 쌀 생산량이 3천만석을 돌파했고, 3년 후인 1977년에는 4천만석을 돌파했다.

 

통일벼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통일벼의 몰락을 재촉했다. 공무원들은 증산목표 달성을 위해 일반벼의 못자리까지 짓밟아가며 통일벼 재배면적 확대를 추진했는데, 예상을 웃도는 증산 실적은 정부에게 이중곡가제에 따른 막대한 양특적자를 남겼다. 박정희 대통령은 밥맛을 따지는 것을 사치라고 여기며 증산만을 위해 달려갔지만, 통일벼를 심는 농민들조차 통일벼는 추곡수매용이고 자가에서 소비할 쌀은 추청벼(아키바레)로 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육종학자들은 통일벼 계열의 새로운 품종을 개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농수산부 연두순시에서 “앞으로는 신품종이 개발되면 개발 품종에 연구원 학자 이름을 붙여 대대손손 영예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1977년에 새로 육성한 이리 327호는 육종책임자인 호남작물시험장장 박노풍의 이름을 따 ‘노풍벼’로, 밀양 29호는 영남작물시험장장 박래경의 이름을 따 ‘래경벼’로 불리게 되었다. 정부는 새로 개발된 노풍벼를 대대적으로 재배하게 했다(육성자는 품종육성 과정에서 노풍벼가 도열병에 취약한 걸 알고, 노풍벼 보급에 반대를 하였는데, 강제로 유통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1978년 한반도를 강타한 변종 도열병은 노풍벼를 쭉정이로 만들어버렸다. 정부의 권유를 믿고 노풍벼를 심었던 농민들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신품종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바람에 육종학자의 이름은 농민들의 원한의 상징이 되었다.

 

쌀밥전쟁

김환표 지음

펴낸곳 : 인물과 사상사

초판발행 2006.7.14.

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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