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부족 문제를 들여다보면 현재의 식량위기가 개발도상국들의 농업을 자유시장에 맞게 재편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쌀은 옥수수와는 달리 전체 생산량의 약 10퍼센트만이 무역을 통해 거래되고 나머지 거의 대부분은 자국 내에서 식량으로 소비되며 농업연료나 사료 등으로 전용되는 사례가 거의 없는 품목이다. 하지만 여태껏 쌀을 자급해왔던 많은 국가들이 무슨 이유 때문에 쌀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는가?
한 국가의 경제를 신자유주의에 맞게 개조하는 과정에서 쌀 수출국이었던 나라가 어떻게 쌀 수입국이 되는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필리핀이다. 필리핀은 지금 매년 100~200만톤의 쌀을 국제시장에서 조달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쌀 수입국이다. 그러나 필리핀이 원래부터 쌀 수입국이었던 것은 아니다. 쌀 자급국가였으며 쌀 수입국이 된 것은 1993년부터였다. 그렇다면 필리핀이 쌀과 여타 농산물을 점점 더 수입에 의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식량을 수출하던 나라가 식량 수입국가로 바뀌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구조조정 때문이었다. 멕시코를 위시하여 나라를 구조조정에 내맡긴 개발도상권 국가들은 모두 하나같이 필리핀과 똑같은 행로를 걸었다.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농업 지원과 관련한 예산이 모두 대폭 삭감되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1990대 중반 무렵에 가입한 WTO는 쌀을 제외한 모든 농산물에 대해 수입쿼터를 폐지하도록 요구했다. 그 결과 필리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차례차례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를 외국산 수입 농산물이 차지했다. 필리핀은 토지개혁 정책에도 실패하여 농업생산성마저 크게 하락했다. 정부지원이 턱없이 부족했던 데다 지주들의 방해공작마저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토지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계은행은 쌀을 그다지 효율성 높은 작물로 여기지 않았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시장주도형 농업개혁을 통해 농업생산의 기반을 영세소농에서 자본지향적인 지주들로 바꿔나가려는 전략적 목적 때문이었다.
무관심과 구조조정과 무역자유화는 모두 여러 해에 걸쳐 필리핀 농업을 심각하게 악화시킨 요인들이다.
필리핀의 농업은 식량 확보와 농촌 인구의 고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국가적으로 대단히 비중이 높은 전략 산업분야이다. 그런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농업분야에 대한 필리핀 정부의 시각이다. 지금의 상황이라면 필리핀은 앞으로도 영원히 쌀 수입국으로 남게 될 것이고 다른 농작물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를 타개할 만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태도를 암암리에 내비치고 있다. 농촌이 국가경제 재건의 핵심요소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외국 영농 기업에 임대할 농장이 소재한 곳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여겨진다.
-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 월든 벨로 지음/김기근 옮김
- 1판 1쇄 발행 2010년 3월 8일
- 펴낸곳 : 도서출판 더숲
- p95 ~ 115, Chapter 02 쌀 수입국으로 전락한 필리핀
- 값 14,900원
'벼, 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벼 농사는 노동 집약적이고 매우 특별한 농사 (0) | 2014.08.08 |
---|---|
쌀 또는 식량이 부족하여 일어난 사건들 (0) | 2014.07.10 |
구별짓기와 경기미, 칼로스쌀 (0) | 2013.07.08 |
쌀에 관한 식량전쟁의 맺음말 (0) | 2013.07.08 |
쥐잡기운동과 코리안 밍크 (0) | 2013.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