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의 재료로 쓰인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 밀은 재배하는데 물과 노동력이 적게 투입된다. 하지만 단위면적당 수확량과 킬로그램당 영양가는 쌀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만일 빵만으로 체중 60 킬로그램의 성인이 하루 필요한 열량을 섭취하려면 3킬로그램 이상의 빵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더욱이 밀은 인체에 필요한 영양소 전부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제품이나 육류를 함께 섭취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이탈리아 남부의 작업장 인부들은 점심 식사로 엄청나게 큰 빵에 몇 개의 토마토와 양파를 곁들여 먹는다.
따라서 그만한 양의 빵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려면 엄청난 규모의 밀밭이 필요하다. 밀은 연작에도 부적합하다. 벼는 물만 제대로 공급되면 연작을 해도 수확량에 큰 변동이 없지만 밀은 연작할 경우 첫해 수확량의 35 - 40 퍼센트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땅을 놀려 지력을 회복시키거나 매년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이곳 저곳 찾아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런데도 작황이 좋지 않아 밀의 가격이 폭등하거나 품귀하게 되면 유럽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빵 걱정을 했다.
1789년 10월, 파리의 배고픈 시민들은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으로 몰려가 20세의 어린 왕 루이 16세에게 빵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해 불에 기름을 부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자유, 평등, 박애를 구호로 내건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됐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처럼 빵은 그 자체로서 완전식품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부식과 보조식을 필요로 하는 주식이지만, 그마저 부족하면 사회 안정을 해치게 되고 심지어 왕조의 패망을 재촉하기도 한다.
- 권삼윤 지음
- 빵은 길을 만들고 밥은 마을을 만든다
- 펴낸곳 이가서
- 초판 1쇄 발행일 2007년 4월 15일
- p 42 ~ 45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18세기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의 유명한 일화,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한 파리 시민들이 궁으로 몰려갔더니 "빵이 없다고요? 아니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은 루이 14세의 부인 마리테레즈가 한 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되기도 전에 이미 당시의 철학자 루소가 이 문장을 풍자적으로 인용했으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말을 했다고 하면 앞뒤가 맞질 않는다. 이처럼 널리 알려진 일화라 해도 무턱대고 믿기보다 여러 책을 읽으면서 확인하고 스스로 판단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럼 왜 앙투아네트가 하지도 않은 말이 그녀가 한 말처럼 떠돌게 되었을까? 그건 사실, 왕비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미움 때문이었다. 앙투아네트를 음해하는 온갖 말들이 떠돌았다. 남몰래 여러 남자를 사귄다는 둥, 프랑스의 국가기밀을 적국 오스트리아에 몰래 알려준다는 둥 이런저런 소문이 있었다.
사람들은 왜 유독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렇게 미워했을까? 여기에는 빵이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했다. 1788년 큰 흉년이 든 데다 겨울에는 혹한까지 닥친것이다. 빵값은 치솟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 때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왕비와 귀족들이 이득을 보기 위해서 밀가루를 부족한 상태로 만들어 놓으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애기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밝혔듯이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비어져 나온, 잘못된 소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는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왕비를 둘러싼 소문을 만들어 내는 일이 많았다.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시민들은 베르사유 궁으로 쳐들어가서 국왕 내외를 파리 시내로 이송했다. 사람들은 이송 중인 마차를 둘러싸고 목이 쉬도록 "빵장수와 빵장수 아내와 빵장수 아들을 파리로 데려가고 있다"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왕과 왕비를 잡아들이기만 하면 곧 공짜로 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식탁위의 세계사
- 이영숙 지음
- 펴낸곳 : (주) 창비
- 초판 4쇄 발행 2012년 8월 18일
- p88 ~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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