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밀, 기타 맥류

보리 문딩이 유래, 벼 이앙과 보리 이모작의 시작

산들행 2014. 7. 27. 10:06

'보리문둥이'란 말은 경상도와 그 지방 사람들의 대명사이다. 그 이유는 경상도 사람들이 보리농사를 어느 곳보다 먼저 많이 지었고, "야 문디야! 니 오데 갔다오노? 이 문디야 오래간만이다." 등의 인사말을 많이 썼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이들은 경상도 보리문둥이의 유래를, 전통적으로 선비나 학자, 사상가들 즉 글공부 많이 하는 文童(문동)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왔기 때문에 주어진 '경상도 문동'의 와전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경상도가 '보리문둥이'가 아니고 설사 '문동'이라 해도 그것 또한 경상도 지방의 상대적으로 풍부한 물산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농사다운 농사인 벼 이앙농법이 경상도에 가장 먼저 도입·확대되었고, 바로 그래서 일찍부터 보리 이모작까지 가능했던 경제적 여유가 문동들을 상대적으로 많이 배출했던 사회경제적 기초였던 것이다.

 

정확히 무슨 이유에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이제 경상도 사람들도 보리밥을 안 먹고 그런 인사말도 거의 쓰지 않는다. 보리밥을 안 먹게 된 것은 아마도 경제개발로 미국 밀가루를 많이 수입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의 밥상에서 보리밥을 완전히 밀어내 준 박정희 대통령 덕택일 것이다.

 

수경 이앙농법이 경상도에서 시작되어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등지로 순차적으로 퍼져나갔듯이, 벼 이앙농법과 한 짝으로 급속히 확대되어 간 맥류재배 이모작도 똑같은 길을 따라 전파되었다. 모든 농사법의 선진지는 경상도였던 것이다.

 

월동작물인 보리는, 동해에 살아남는 상한선인 금강 이남의 삼한지방에 한해서지만, 이앙농법과는 달리 당국의 권장작물이었기 때문에 단시간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특히 영남지방에만 집중적으로 재배, 상식되어 영남인의 별명이 보리문딩이가 되게 한 자연지리젹 조건은 무엇인가? 당시로서 벼와 보리 이모작은 그 이앙과 수확기의 중첩으로 벼의 이앙법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앙법이 영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보리 이모작도 빨리 전파·확대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영남지방이 다른 지방보다 보리농사를 더 열심히 짓고 또 보리를 상식했다면, 그것이 좋아서라기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긴 보릿고개 길을 넘어 가을까지 살아남을 수 없을 만한 절박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기후와 지리 등의 자연조건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농사는 평지 대신에 구릉지나 산에서 화경으로 시작된 것이다. 수리시설이 발달되기 전의 평원이란 비가 안오면 물 한방울 없다가 비가 오면 상습적으로 강물이 범람하고 강 하구에는 때로는 바닷물도 밀려드는 황무지거나 갈대밭이다. 그래서 수전 벼농사의 시작은 자연수의 이용이 용이한 산간계곡을 낀 산록에서 시작되었다. 같은 기후조건이라면 당연히 호남보다 산간계곡이 많아 자연수가 흔한 영남으로 사람들이 먼저 많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조건이 유리하다고 한정된 땅에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계속 몰려 산다면 식량이 부족해지고, 선진 이앙벼 농법과 그 짝인 보리 이모작이 그래서 경상도에 먼저 도입·확대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농사조건이 좋은 곳이라 계속 몰려든 결과가 배고픔이고, 그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도가 이앙농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끝나지 않는 배고픔이 보리 이모작 기술의 도입을 촉진했다. 그 결과 이 지방의 민중들은 다른 지방에서는 거의 먹지 않는 미끈미끈한 맛없는 보리밥을 상식해야 했다.

 

- 천규석 지음

- 쌀과 민주주의

- 발행처 녹색평론사

- 2004년 7월 20일 제1쇄 발행

- p238 ~ 247

- 값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