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밀, 기타 맥류

밀가루와 만두가 대중화 된 시기는?

산들행 2014. 8. 2. 10:35

보통 봄밀은 연간 평균기온이 3.8℃이면서 여름 평균 기온이 14℃ 이상인 지역에서 재배되어야 품질도 좋고 생산량도 많다. 비가 많이 오는 한반도는 봄밀을 재배하는 데 적합한 지역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겨울밀을 재배했는데, 밀농사가 가능한 곳이라고 해도 벼농사가 마무리되는 늦가을에야 파종해 음력 6월 보름, 유두를 앞두고 밀을 수확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밀의 품질이 좋지 않고 생산량 역시 적었다. 그러니 궁중에서나 부자들만이 겨울 밀가루를 구해서 밀가루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밀가루를 구하지 못하면 메밀가루로 대신했다. 이런 연유로 조선 후기 조리서에서는 대부분 메밀가루로 만두피를 만든다고 적혀 있다. 

 

1931년에 발간된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 25주년 기념지≫에 의하면, 식민지 시기 조선의 재래종 밀은 황해도, 평안남도, 강원도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그중 황해도에서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재래종 밀 중에서 품질이 가장 좋은 것은 황해도에서 재배된 것이다. 평안도는 봄밀 농사가 남부 지역보다 수월했을 뿐 아니라, 압록강을 맞대고 있던 중국의 동북 지역인 만주가 겨울밀의 산지였기 때문에 밀가루도 제법 풍부한 편이었다. 그래서 식민지 시기 평양에는 온반과 같은 국밥을 판매하는 음식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음식점에서 메밀가루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끼니음식으로 판매했다. 

 

냉면은 본래 겨울음식이었다. 겨울에 냉면을 먹는 풍속은 이미 조선 후기 평안도나 황해도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1910년데 들어 사람들은 냉면을 여름음식으로 먹기 시작했다. 이러한 냉면의 변신은 근대적인 제빙기술과 겨울에 캐낸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할 수 있는 냉장 시설의 탄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침내 1920년대 말이 되면 한강에서 체빙하여 저장해둔 얼음으로 인해 냉면은 겨울과 여름은 물론이고 봄이나 가을에도 먹는 사시사철 음식이 되었다. 

 

만두의 대중화에는 밀 품종의 개량과 적극적인 재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처음에는 밀농사를 권장하기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밀가루를 수입하는 정책을 폈다. 1910년대만 해도 한반도는 일본의 쌀 보급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체식품으로 밀가루가 필요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의 중요성을 자각한 조선총독부는 1923년 이후 재래종밀의 품종 개량에 나섰다. 수원소맥 6호를 필두로 하여 생산량이 많은 품종이 속속 개량되어 농촌에 보급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밀가루는 그전에 비해 훨씬 구하기 쉬운 식재료로 자리를 잡았다. 

 

만두의 대중화에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제물포와 서울로 이주해온 산둥 지방 출신의 중국인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대도시 서울로 이사를 온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 사람들 역시 만두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조선 최초의 맛기행 책인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쓴 허균(許筠, 1569 ~ 1618)도 대만두는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고 기록한 바 있다. 그만큼 평안도의 만두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하지만 평안도 대만두가 서울에서 인기를 누린 때는 식민지 시기에 들어와서다.  더욱이 1945년 해방 이후 월남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냉면과 함께 필수 메뉴가 되었다.

 

- 식탁위의 한국사

- 주영하 지음

- 발행처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

- 1판 1쇄 발행일 2014년 1월 6일

- P125 ~ 141

- 값 2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