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곡물은 기장(Panicum miliaceum)이었다. 기장은 바람에 흔들려도 탈립이 되지 않은 풀이었고, 번식이 잘 되어 경작의 특성을 만족시키는 곡물이었다. 기장(Millet)은 벼과의 식량작물로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유사 이전부터 재배된 식량의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이후 기장은 중국, 몽골, 키르키스탄과 고대 인도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인도를 정복한 아리안족이 그들의 곡식이었던 쟈바스(djavas), 곧 보리를 끌어들여 기장의 자리를 빼앗았다.
보리는 늘 귀리의 견제를 받았으나 오히려 호밀에 자리를 대부분 넘겨주고 고작 인도의 일부, 중국의 일부와 우리나라에서 식량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귀리가 식량으로서 인간의 홀대를 면치 못했던 것은 탈립이 심하고, 낱알이 작은 탓이었다. 귀리는 말사료로 이용되었다.
호밀은 원천적으로 인간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었다. 밀에 밀려나 잡초처럼 지내다가 어느 날인가 흑해 연안의 수출곡물(밀)에 섞여 남부 러시아로 옮겨진 잡초 꼴의 호밀이 생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를 계기로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영국으로 번져 나갔다.
특히 시베라아로 원정 간 호밀은 밀과의 경쟁에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시베리아 농민은 이를 흑밀이라 부르며, 밀과 호밀을 섞어서 혼파하였다. 해마다의 날씨에 따라 따뜻하면 밀이 자라고, 추우면 호밀이 자랐다.
에티오피아(아비시니아) 원산이었던 밀은 뒤늦게 등장하였지만 데뷔의 과정은 찬란하고 성공적이었다. 이집트에서는 보리와 밀이 재배되었는데, 이집트인들에 의하여 빵이 발명되었다.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보리, 기장, 귀리 따위를 반죽하여 고작 납작하게 구운 빵(flat bread)을 먹던 때였으며, 발효과정을 거쳐서 부풀어 오르는 빵으로는 오직 밀과 호밀만 사용이 가능하였다. 밀은 보리를 무대밖으로 밀어내고 일약 곡식의 왕이 되었다.
- 우리농업의 역사 산책
- 구자옥 지음
- 펴낸곳 한국학술정보(주)
- 초판발행 2011년 4월 13일
- p23
- 값 3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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