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는 교황이 사치품, 조각상, 태피스트리 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 때에 이에 반기를 들었고, 그래서 "농민만을 공명정대한 사람"으로 자각하여 농민전쟁을 부추기며, 로마법에 따른 가톨릭교회를 파괴하고 루터교회를 세우는 종교개혁을 선도하였다. 교회의 횡포, 영주에 의한 부역노동, 연방군주에 의한 조세부담 등에 시달리던 농민에게 루터의 교리는 자유의 복음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불리한 전세와 토지의 사유화를 걱정하여 변심함으로써 농민반란을 크게 비난하며 농민군을 철저히 타도하고 응징하도록 주장을 바꾸었다.
따라서 독일의 농민전쟁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맞물려 치러진 비극 가운데 비극이었다.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변역하여 예수의 진실을 일깨웠고, 이에 따라 영주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 모세의 농지법에 의한 개혁을 왕족, 도시민, 주교, 영주에게 부르짖으며 농민의 궐기를 선동하는 "농민강령 12조"를 주장하였다. 이는 단순히 빵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농노화한 농민의 주권과 형평성 있는 세제의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농민들의 정당한 불만에 동정을 나타냈고 제후들을 비판했다.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수적으로 우세한 농민들의 승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기와 전술에 무지한 농민들에게 불리하였고, 결과적으로 농민의 패배는 루터의 태도 변화에 기인하였다. 영주들의 착취에 저항하여 일으킨 농민전쟁에 대하여 처음에는 동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복음을 독재 체제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보아서 영주들에게 강경진압을 요구하였다.
위급한 정치적 혼돈에 직면한 루터는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농민의 무리에 대하여>라는 거칠고 독설적인 글을 발표했다. 루터는 "강도와 살인의 무리인 농민군을 규탄한다"는 선언을 하면서 "농민군은 저들의 마지막 숨을 토할 때까지 쓰러뜨리고 죽여야 하며, 이에 나서는 제후 편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하느님의 참된 순교자이며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었다. 농민군의 "적색태러"도 무참한 것이었지만 귀족계급의 승리로 결말된 "백색테러"는 참으로 처참한 것이었다.
<중략>
"아담이 땅을 일구고 이브가 길쌈할 때에 어디 왕후장상이 따로 있었더냐?"라는 말은 영국의 농민봉기를 이끌었던 성직자 존 볼의 설교 한 마디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사람은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농민전쟁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상의 왕국은 불평등 없인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지주고 나머지는 농노여야 하며, 어떤 사람은 왕이고 나머지는 신하가 되어야 한다." 루터는 귀족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반도들은 유해무독하며 악마의 화신이라는 점에서 그들보다 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대들은 농민반도들을 죽이기를 마치 미친 개를 때려잡듯 해야 한다. 만약 그대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이 그대를 공격할 것이며 그대의 토지를 모두 뺏어갈 것이다." 독일의 농민전쟁은 진압되었다. 농민의 지지를 잃었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공인되었고 신교(프로테스탄트)로 성립되었다.
(원본을 중심으로 내용을 검색하여 추가하였음)
- 우리농업의 역사 산책 - 구자옥 지음 - 펴낸곳 한국학술정보(주) - 초판발행 2011년 4월 13일 - p16 ~ 17 - 값 39,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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