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물일반

두레를 낳은 장본인은 모내기였고 제초제 때문에 소멸했다.

산들행 2014. 10. 30. 09:55

마른 땅에 그대로 볍씨를 뿌려 농사를 짓는 건갈이는 일찍이 조선 전기 농서 <농사직설>에서 이미 향명(鄕名)으로 건삶이(乾沙彌, 건사미)로 불린 농법이다. 그러나 모를 옮기는 이앙법이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조선 후기에는 남부지역의 경우 대부분 물삶이로 농사를 짓게 되었다. 다만 서북지방은 물이 잘 빠지는 토양이라 이앙법이 부적합하여 여전히 건갈이를 하고 있었다.

 

두레는 농사일의 어려움을 상부상조로 극복했던 가장 전형적인 공동체 조직이다. 두레는 초여름에 조직을 정비한다. 모내기가 끝나면 시원한 정자나무 그늘에 모여서 두레를 이끌어나갈 일꾼을 뽑았다. 좌상, 영좌, 총각대방 등의 지도자들이 뽑혀 김매기를 이끌게 된다. 사실상 집중적으로 김을 매는 여름은 매우 더운 철이다. 게다가 뙤약볕에서 일시에 많은 논을 맨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두레꾼들은 풍물을 꾸려서 악기를 치고 신명을 잡으며 논두렁으로 들어갔다.

 

두레를 낳은 장본인은 모내기였다.

 

모내기는 17세기 후반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농사직설>에 '삽앙(揷 을 삽)'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도 모내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내기철만 되면 가뭄이 드는 특유의 몬순 기후 탓에 모를 내지 못하여 농사를 작폐하는 일이 있었다. 그 뒤로 모내기를 국가적으로 금지시켰다. 이렇게 금지했는데도 모내기가 소출이 많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완강히 모내기 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인 17세기 후반쯤에 이르면 남도 전역은 거의 모내기를 했다.

 

모내기는 이모작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때쯤이면 보리도 패여서 배고픔을 달래주게 된다. 모내기철과 보리 수확이 맞물려서 일년 중 가장 분주한 농번기가 찾아든다. 그래서 두레 같은 강력한 노동조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였다. 두레는 중남부지방에서 서서히 북상하여 북쪽의 논농사 지역으로 퍼졌다.

 

그러나 해방 전후시기까지만 해도 전해지던 두레는 제초제가 들어오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다만 풍물패의 풍물굿에만 일부 유산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 우리문화의 수수께끼2

- 지은이 주강현

- 펴낸곳 한겨례출판(주)

- 개정판 8쇄 발행 2010년 5월 7일

- p260 ~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