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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진왜란, 유성룡 그리고 이순신

산들행 2014. 10. 31. 23:21

선조는 나라를 버리면서 명에 의존하려고 했다. 선조는 조선의 군대를 불신했다. 백성도 믿지 않았다. 오로지 명나라와 명군을 철저하게 믿는 나머지 명의 직할통치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국가의 존속보다 왕위의 존속을 우선시했고, 왕위만 지켜진다면 나라의 주권도 포기할 수 있고, 한강 이남의 땅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본군에게 내 줄 수 있다고 했다.

 

선조의 뜻대로 명의 총책 양호는 조선군의 병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조선의 국왕과 대등한 위치에서 조선 신료들을 만났다. 직할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선조는 한 나라의 힘을 모두 쏟아서 명군 장수들을 섬기고, 심지어 그 휘하의 편비장에 까지 온몸을 굽혀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조선군은 이제 독자적인 작전권이 없었다. 모든 일에 명군의 허락을 따라야 했다. 병사들은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서 명령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명군에게 차별과 학대를 받았다. 모든 전투에서 패했다. 패전의 허물은 당연히 조선군이 덮어 썼다.

 

선조가 자기 군대와 백성은 불신하면서, 양호를 비호하려고만 드는 모습을 유성룡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선조와 선조의 명나라 의존정책을 지지해온 신료들이 유성룡 탄핵의 막을 올렸다.1598년 9월 24일 이이첨으로 시작된 유성룡에 대한 탄핵 상소는 11월 19일 파직되는 두달여 동안 하루도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유성룡은 물러나겠다는 사직서를 쉴새 없이 내고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유성룡을 탄핵하는 상소문은 칼날같이 날카롭고 험악했다. 영의정 5년 동안 치적을 폐혜와 악으로 가득 찬 폐정이라고 질타했다. 유성룡이 추천하고 발탁하여 임진왜란의 위기를 막고 지켜낸 이순신·권율·고언백을 '치질이나 빠는 무리들'로 능멸했고, 군량 보급에 매진하다 지쳐서 죽은 이성종도 같은 무리라고 단죄했다. 또한 친족을 등용하는 족벌주의자, 토지를 긁어모으는 부정부패의 원흉이라 지목했다. 권력을 쥐는데 눈이 멀어버린 자들은 유성룡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데 광분했다. 온 조정의 신료도 모자라 전국 곳곳의 유생들을 끌여들였고, 마침내 성균관 유생들까지 동참하도록 강요했다.

 

이순신을 '역사의 이순신'으로 만들고 존재케 한 사람은 유성룡이었다. 유성룡 없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고, 이순신 없는 유성룡이 있을 수 없다. 조선은 바로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있음으로 해서 조선이었다.

 

고니시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이순신을 증오하고 있는 선조의 심리와 그를 에워싸고 있는 조선 신료들의 이순신과 유성룡에 대한 시기와 증오심을 역이용하려는 전략이었다. 이순신은 군사기밀을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선조는 이순신의 죄목을 백단으로 얽어 죽이려고 했다. 선조는 그저 이순신을 죽여버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순신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것이 1597년 1월 27일이고, 정유재란이 시작된 것은 1597년 2월 21일이었다. 이순신이 감옥에서 처형 날짜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가토 기요마사는 정유재란 제1진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징비록]에 따르면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이 노량앞바다에서 최후를 맞던 날, 유성룡은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 삭탈관직까지 당했다. 광분한 권력의 광기요, 속 좁고 비열한 선조의 변덕과 치졸함이 얽혀서 빚은 비극이었다. 유성룡은 1607년 5월 6일, 죽는 날까지 다시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다.

 

- 장계향 조선의 큰 어머니

- 지은이 정동주

- 펴낸곳 (주)도서출판 한길사

- 제1판 제1쇄 2013년6월 30일

- p49 ~ 51

장계향 - 조선의 큰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