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감자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감자의 권리선언

산들행 2014. 11. 12. 20:26

감자의 원산지는 칠레와 페루에 해당하는 안데스 산맥의 고지대이다. 감자는 기원전 3000년전경부터 안데스 산맥 고지대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잉카인들이 오늘날의 페루 지역을 점령하여 대제국을 세운 기원후 1400년 무렵, 그곳 주민들은 색, 크기, 맛, 성장조건이 다양한 여러 품종의 감자를 재배하고 있었고, 잉카 제국의 언어인 케추아어로 '파파스(Papas)'라 불렸던 감자는 옥수수, 고추, 때로는 여러 육류를 곁들여 먹는 주된 식량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전설로 전해오던 잉카 제국의 금과 은을 노리고 온 스페인의 피사로(Francisco Pizarro)가 제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감자와 만나게 되었다. 피사로와 그의 병사들은 그때 감자를 처음 맛보게 되었고, 그런대로 먹을 만 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맛본 이 식물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감자는 그때까지 유럽 사람들이 소비하던 작물과는 다른 점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16세기 유럽인들에게는 덩이줄기 식물 자체가 매우 낯선 것이었다. 물론 그들도 당근이나 순무를 먹었지만 감자는 이 두가지 뿌리와는 생김새가 매우 달랐다. 특히 유럽인들에게 생경했던 것은 그 재배 방식이었다. 그들이 알던 대부분의 작물은 씨앗을 뿌려서 재배하는 것이었는데, 안데스 산맥의 주민들은 감자 자체를 잘게 잘라 심었고, 신기하게도 그 작물 부분이 하나의 완전한 식물로 자라났던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러한 특성들은 감자를 둘러싼 많은 오해와 편견의 원인이 된다.

 

유럽에 들어온 감자는 처음에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상당히 꺼리던 식물이었다. 울퉁불퉁하고 못생겼으며 더러는 시커멓기까지 한 외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땅 밑에서 자라난다는 점, 그리고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잘 자란다는 점까지, 아직 미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럽인들에게 감자는 뭔가 악마의 계략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미심쩍고 수상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중세 우럽에서 흑마술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실제로 독성이 강한 베라도나(Belladonna, 아름다운 귀부인이라는 뜻)의 꽃과 감자의 꽃이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점은 의심을 더욱 키웠다.

 

감자에 대한 첫번째 편견은 감자가 나병을 일으킨다는 생각이었다. 나병은 유럽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병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편견은 아마도 감자의 껍질이 매우 거칠고 울퉁불퉁해서 나환자의 피부를 연상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감자가 일찍 수입된 프랑스의 몇몇 지방에서는 이 이유를 들어 감자 재배를 금지하기도 했다. 두번째 편견은 감자가 미약(媚아첨할 미 藥약 약), 즉 성적 흥분제의 역할을 한다는생각이었다. 사실 처음 이런 의혹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토마토와 고구마였는데, 감자는 고구마와 생김새가 비슷했기 때문에 덩달아 의심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아일랜드와 북유럽 등 감자를 많이 먹게 된 지역에서 높은 인구 성장률을 보이자, 이것도 감자의 최음 효과 때문이리고 해석되기도 했다. 이는 물론 감자 덕택에 그 지역 주민들의 영양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일 따름이다. 감자가 그저 돼지 먹이로나 어울리고, 서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는 음식이라는 생각은 생명력이 끈질겼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감자를 고급 식재료로 쳐주지는 않는다.

 

감자를 둘러싼 여러 편견 때문에,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농부들은 감자 재배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만은 달랐다. 아일랜드는 춥고 습한 기후는 감자 재배에 매우 적합했다. 더군다나 17세기 중반 무렵, 아일랜드에 감자가 널리 퍼져 재배된 데는 이러한 자연 조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잉글랜드와의 갈등과 전쟁에 시달려왔다. 17, 18세기에 아일랜드 대부분의 토지는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소유였고, 지주들은 환금성이 높은 수출용 작물 재배나 가축 사육을 위해 그 땅을 사용했다. 즉 농민들의 실제 필요와는 상관없이 토지가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던 아일랜드 농민들에게 넓은 땅이나 농기구도 필요 없고, 돌볼 필요도 별로 없는 감자는 그야말로 하늘의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감자는 땅속에서 자라고 오랫동안 보관되기 때문에, 서리를 비롯한 악천후나 전쟁의 말발굽에서도 상당히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한편,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정부가 강력하게 개입하여 감자 재배를 권장하기도 했다. 계몽주의 이상을 받아들여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한다는 구실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계몽전제군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1756년 국민들에게 감자 재배를 강요하는 '감자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입맛이 까다롭기로 이름난 프랑스에서는 감자 재배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바꿔놓기 위해 여러 계몽주의자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파리망티에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그는 1756년부터 1763년까지 계속된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어 독일에서 1년이 넘게 감금생활을 하면서 거의 감자만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는데, 그때 감자가 가진 식품으로서의 장점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1763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감자의 보급을 위해 힘쓴다. 1785년 8월, 베르사유에서는 루이 16세의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한창이었다. 그때 수많은 귀족을 헤치고 한 남자가 연보라빛 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국왕에게 바친다. 국왕은 그 꽃, 바로 감자꽃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슴에 꽂아준다. 감격한 파르망티에는 "폐하, 이젠 굶주림이란 불가능합니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또한 국왕을 따라하려는 수많은 귀족들이 감자꽃을 찾는 바람에 그 천대받던 식물의 꽃값이 무려 금화 열냥까지 올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파르망티에의 주장에 동의한 루이 16세는 파리 근교의 땅을 하사했고, 파리망티에는 그 땅에 감자를 재배했다. 그리고 그 밭에 경계를 서는 병사들을 배치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낮에만 감시를 하는 척하다가 밤에는 사라져버렸다. 아주 귀중한 것을 지키는 양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서민들이 이 '금지된 과일'을 훔쳐다 맛보고, 또 재배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 18세기의 맛(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 1부 식탁 위의 논쟁 -  미심쩍고 수상한 미지의 작물(이영목)

- 지은이 안대희·이용철·정병설 외

- 펴낸곳 (주)문학동네

- 1판 2쇄 2014년 3월 31일

- p63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