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감자

감자 도입과 최음제, 감자바우 에피소드

산들행 2014. 10. 4. 23:57

감자는 16세기 중반 스페인 사람들이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서 발견해 유럽에 보급했으나, 오랜 기간 홀대를 면치 못했다. '악마의 식물'로 낙인 찍힌 가운데, 먹으면 나병이 걸린다는 등 악성 루머가 퍼저 '돼지 또는 전쟁 포로들에게나 주는 비천한 식품'으로 치부되었다. 이는 조리법이 제대로 개발되지 못한 시절 감자 싹에 들어 있는 유독물질 '솔라닌'의 피해가 부풀려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더럽고 시커먼 땅속에서 나오는 투박한 열매라는 겉모습에 따른 미신과 성경에 나오지 않는 식물이라는 왜곡된 신앙심에서 비롯된 편견 역시 감자 홀대에 한몫했다. 이러한 오해의 잔재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있다. Potatohead(얼간이), couch potato (게으른 놈), hot potato (뜨거운 감자) 등 서양의 부정적인 표현마다 억울하게도 감자가 결부되어 있다.

 

이와 달리 감자를 남자의 고환으로 상징화해 강장식품으로 둔갑시킨 사례도 있다. 총 여섯 번의 결혼과 화려한 여성 편력 등으로 유명했던 영국의 헨리 8세는 감자를 최음제로 여겨 자신의 정원에 심어놓고 정성껏 가꾸었으며, 귀족들도 은밀히 이를 따랐다고 한다. 한편 일반적으로 '감자와 바위가 많은 산촌에 사는 강원도 남자'를 의미하는 '감자 바우'와 관련된 야설 또한 흥미롭다. 예부터 "강원도 남정네의 고환이 마치 그 지역에 많은 감자와 바위처럼 튼실하다"는 소문이 구전되어, 급기야 음탕한 황제라 불리던 청나라 서태후 귀에까지 들어가 "조선의 강원도 사내 열 명을 데려오라"고 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까지 전해온다.

 

여하튼 감자 보급 초기에 유럽에서 씌워진 누명도 세월이 흐르고 문명이 진화하면서 점차 벗겨진다. 연구결과, 감자에 독성은 커녕 오히려 비타민 C, 식이섬유 등이 풍부한 데다 맛도 자극적이거나 유혹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담백함의 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더구나 감자는 짧은 재배기간, 우수한 저장성 등을 무기로 대흉년 또는 기근을 겪을 때마다 민초들을 굶주림과 영양결핍으로터 구해내는 수호천사 역할을 했다. 이로써 인류의 생존과 인구 증가를 지탱해온 '은인 식물'로 인식되고, 급기야 '땅에서 나는 사과'로 칭송받기에 이른다. 지난 2000년 세계 빈곤 퇴치를 새천년 최우선 과제로 선정한 유엔은 2008년을 '감자의 해'로 선포하고, 감자를 'Hidden treasure (감추어진 보석)'이라고 소개하며 다량재배를 권장하기도 했다.

 

감자가 한반도에 들어온 경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1820 ~ 1830년대 만주˙간도지방을 거처 유입되었다는 설과, 서양 선교사에 의해 서해안 일대에 최초로 전래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북저(北薯 참마 서, 고구마 저, 감자 서)', '토감저(土甘薯)'라고 했으며, 감자라는 호칭은 고구마를 의미하는 '감저(甘薯)'와 구분 짓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식 명칭인 '마령서(馬 말 마방울 령감자 서)'라고 했는데, 감자를 '말의 방울'처럼 여긴 것이 재미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감자는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에서 주로 화전민들 사이에 '흉년에 기아를 이기는 작물'로 집중 재배되었다. 특히 강원도의 경우 감자가 반주식 역할을 함으로써 감자전, 감자수제비, 감자송편, 감자옹심이, 감자술 등 온갖 토속음식이 생겨났으며, 지금도 전국 감자 생산량의 4분의1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산지로 '감자골'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 지은이 홍인희

- 발행처 교보문고

- 발행일 2011년 5월 30일 초판 1쇄

- p104 ~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