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작물

임진왜란 그리고 대항해 시대의 후추에 관한 이야기

산들행 2017. 5. 13. 12:05

사람 목숨과 맞바꾸던 악마의 향신료, '후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침략을 계획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후추'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임진왜란 전후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나온 일화가 있다.

 

1586, 조선에 사신으로 온 유즈야 야스히로(柚谷康廣)라는 인물이 조선 조정대신들과의 축하연에서 술에 취한 척하며 일부러 주머니를 끌러 후추 한줌을 바닥에 흘렸는데 고관대작들은 물론 노래하던 기생, 악기를 연주하던 악공들이 모두 후추를 주우려고 달려들어 자리가 난장판이 됐다고 한다. 외국 사신을 앞에 둔 공식행사에서 이는 엄청난 국가적 망신이었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쓴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 이런 조선의 정세를 알리자 때문인데 후추 한줌에 무너지는 조선조정의 기강해이를 들은 히데요시가 본격적으로 침략준비를 했다는 일화다.

 

당시 후추는 전 세계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렇게 국가적 체면을 벗어던지고도 달려들어 주워 갈만큼 엄청난 인기상품이었다. 돈이 있어도 좀체 구할 수가 없는 희귀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후추를 향한 당시 사람들의 열망은 엄청났고, 서구에서 목숨을 걸고 대양을 넘나드는 대항해시대를 연 것도 후추에 대한 열정이었다.

 

금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된 후추는 높은 가격 안정성을 가지게 되면서 중세 유럽에서는 금보다 선호되는 안전자산으로 거래됐다. 이런 당시 유럽에서 후추 수급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게 된 것은 1453, 그 이전까지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수급을 받을 수 있던 후추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제국에게 함락되면서 안 그래도 비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오스만 터키제국은 후추가 들어오는 동방 교역로를 모두 장악한 뒤, 후추가격을 크게 올려 막대한 중계이익을 챙겼다. 더구나 이슬람 국가들이 후추의 주요 생산지인 인도와 동남아시아 일대를 모두 장악하면서 독점교역이 더욱 심해졌다. 생산지의 상인들이 후추 가격을 조절하기 위해 생산량을 고정시키고 수확이 많은 경우에는 후추나무 숲을 불태우기도 하며 수급을 조절하자 가격은 좀체 떨어지질 않았다.

 

이에 서구권 국가들은 생산지와의 직교역을 원했고 오스만 터키제국을 피해 교역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노력했다. 여기에 처음 뛰어든 국가가 포르투갈이었고,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항해 성공으로 새로운 후추 교역로가 뚫렸다. 항로가 열리자 너나할 것 없이 후추를 찾아 인도로 떠나는 항해자들이 늘어났다.

 

후추장사는 엄청나게 남는 장사로 배 10척이 떠나 풍랑을 만나 9척이 가라앉고 1척만 유럽으로 들어와도 순이익이 5배가 남는 장사였다. 고수익을 낳는 벤처 사업분야로 후추 교역이 인기를 끌면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새 항로를 개척하고자 항해사들을 고용해 항로를 개척하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 이런 인물 중 대표적 인물이 신대륙의 발견자로 명성이 높은 콜럼버스와 세계 최초로 지구 한바퀴를 돈 인물로 유명한 마젤란이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아메리카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고 있었고 마젤란의 탐험대는 남미에서 태평양을 건너 동남아시아로 가는 위험천만한 항로를 개척해 결국 후추를 얻는데 성공했다. 기나긴 여정에서 9척의 배 중 1척을 제외하고 모두 잃었고 200여명의 선원 중 18명만 살아남은 처절한 사투였으며 함대 지휘관인 마젤란 역시 탐험 도중 사망했다. 하지만 그 1척에 실어온 후추만으로도 이익이 남았다. 수많은 탐험가들을 사지로 내몰 만큼 후추의 유혹은 그만큼 강렬했던 셈이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현우 기자 2017.05.12.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51209355068928


<우리음식문화의 지혜>에서

육식이 일반화한 14, 15세기경부터 후추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같은 매운 맛의 향신료인 고추의 사용으로 이어진 것이다.

오늘날 한국요리에는 매운 요리가 많지만 그 역사는 그다지 오래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후추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고추의 매운 맛이 정착하는 데는 여뀌나 산초가 그 이전의 향신료로 쓰였다는 점보다 후추가 일반백성에게 널리 공급됐다는 점이 더욱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요리에 쓰이는 고추는 육식의 도입과 관련되어 정착됐지만 한국음식이 전부 다 매운 음식만 있는 것이 아니며, 고추가 들어오기 전의 요리는 맵지 않은 요리가 많았다는 것을 부언해 둔다.

나물 종류도 간장과 참기름만으로 무치는 경우가 많았다. '전'은 생선이나 야채를 얇게 저며 계란 노른자를 풀어 옷을 입혀 기름에 지진 요리다. 유명한 '신선로'는 맵지 않다. 특히 관혼상제와 같이 격식을 갖춘 상에 내는 음식에는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다. 고추가 도입되기 전에 이미 그런 격식이 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