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쌀

단오놀이가 크게 성행하지 못한 이유는 이앙법과 이모작 때문이다.

산들행 2017. 6. 4. 16:39

여름철 놀이의 정점은 본래 단오였다. 주요 밭작물의 수확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가령 앞서 석전(돌팔매싸움, 石戰)이 정원 대보름의 놀이라 했지만, 원래는 단오 놀이였다. 그런데 단오가 드는 양력 6월 초중순은 농사력의 진행상 놀이의 철이 되기에 몇 가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이앙법 농사가 확산되자, 이때는 모내기철로 1년 중 가장 바쁜 때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모내기는 대게 양력 6월 5일경에 드는 망종 때 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이때는 아직 봄가뭄이 이어졌고, 6월 하순에 들어서야 '못비'가 조금 내리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들어 이앙법 농사의 이점이 널리 알려졌음에도 이를 국가적으로 금지했던 것은, 이런 건조 기후에서 모내기를 하려다가 자칫 한 해 농사 전부를 망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모내기는 양력 6월 중하순이 되도록 끝나기는 커녕 시작도 못 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7월에 들어서 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따라서 모내기는 기약 없이 늦어지기 십상이었으며, 물관리에 일손이 바쁘고 농촌의 민심조차 흉흉해지기 마련이던 이때는 큰 놀이의 철이 되기 어려웠다. 단오놀이였던 석전(돌팔매싸움, 石戰)이 정월 대보름으로 옮겨간 것, 아울러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 단오놀이의 비중이 점점 줄어든 것은 이런 상황과 관련 있다. 민속학계에서는 한반도의 기층문화권을 북부의 '단오권', 서남부의 '추석권', 동남부의 '단오-추석 복합권'의 세 영역으로 나누는 논의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밭농사 지역에서는 단오문화가 강하고 논농사 지역에서는 그러기 힘들다는 사정은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밭농사 자체를 봐도 6월이 놀이철이 되기에는 약간 문제가 있었다. 1년 1작으로 밭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는 별문제가 없지만, 밭에서 1년에 두 그루를 갈아먹는 이모작 농사를 짓는다면 보리와 밀 등 앞그루 작물의 수확이 끝나자마자 조, 콩, 팥 등 뒷그루 작물 파종에 나서야 했다. 그러다보니 경기 중부에서는 밭 앞그루 작물의 수확, 밭 뒷그루 작물의 파종, 약간 늦어진 논의 모내기 등 세 가지 작업이 거의 함께 진행되는 이 시기를 '삼그루판'이라 부른다. 조선 후기 농서에서도 이때를 삼농극망지시(三農劇忙之時) 즉 '세 가지 농사로 지극히 바쁠 때'라고 적은 기록들이 있다. 이처럼 삼그루판은 1년 중 농사일이 가장 바쁜 철로, 일손이 모자라 품일꾼의 임금도 앙등한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삼그루 판에서는 부지깽이도 뛴다'거나 '삼그루판에 제 일 할때는 굼벵이도 세 길을 뛴다'는 식으로 그 분주함을 묘사한다. 이때는 도저히 놀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논농사가 중심이 되는 농업환경이 아닌 곳에서도, 밭 이모작이 확산되는 조건 아래에서는 여름의 놀이철로서 단오의 위상이 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놀이로 본 조선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 펴낸곳 (주)글항아리

- 초판발행 2015년 7월 10일

- p62-66(2장 극단적인 노고 속에서 한 판 벌이는 유희 / 안승택)

놀이로 본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