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에 대한 예의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시집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문학과 경계, 2002)
원 콩나물 얘기냐고 웃을지 모르겠습니다. 콩나물에 대한 예의라니요? 그러지 않아도 세상에 지켜야할 범절이 얼마나 우리를 괴롭힙니까?
시인은 콩나물에 대한 예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콩나물에게 뿌리는 근본이면서 발돋움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뿌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고 나아가 미래에 다름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콩나물은 시인처럼 캄캄한 터널을 겪어왔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콩나물은 시인 자신의 삶이 투사된 또 하나의 생명이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시인의 콩나물에 대한 예의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예의 없는 것들이 이 점을 알아차렸으면 좋겠습니다.
- 시, 세상에 말을 걸다. - 지은이 윤성희 - 펴낸곳 새미 - 초판 1쇄 발행일 2010년 12월 24일 - p12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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