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콩

안도현의 시 콩밭 짓거리

산들행 2018. 2. 12. 19:47

콩밭짓거리

                      안도현

귀갓길에 좌판을 펼친 노파에게 물었다
이 열무 한 단에 얼마예요?
그런데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대뜸 콩밭짓거리,라고 한다

사내가 열무값을 묻는 게 무슨 짓거리라는 말인가?
(불알 두 쪽 떨어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아니면 내가 콩밭에서 한 짓거리를 다 봤다는 뜻일까?
(콩밭에 쭈그려앉아 똥 눈 적 있으나 이미 삼십년도 더 된 옛일!)
그도 저도 아니라면 이 세상에 와서 저지른
나의 모든 못된 짓거리를 호통치는 소리일까?
(그렇다면 이 노파는 나를 꾸짖으러 내려온 지장보살?)
도대체 콩밭짓거리라니,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앞에
열무를 숭숭 썰어 밥 비벼먹고 싶은 저녁이 갑자기 난감해졌다
이 콩밭짓거리 겁나게 좋은 거 알지? 노파는
벌레가 송송 뚫어놓은 열무 잎사귀를 펼쳐 보였다
나는 농약을 치지 않은 것이라 여기고 서둘러 값을 치렀다

한참 후에야 알았다, 콩밭짓거리
콩밭 고랑 사이사이에 씨 뿌린 열무 따위의 푸성귀를
전라도에서는 여름철에 김칫거리로 곧잘 쓴다는 그것을
콩밭짓거리라고 부른다는 것을

콩밭의 햇볕, 콩밭의 그늘
반반씩 골고루 받아먹고 자란 콩밭짓거리
그 줄기를 씹으면 사각, 연둣빛 단물이 입에 고여 찰방거리는
벌레도 사람도 반반씩 사이좋게 나눠먹는 콩밭짓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