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주

러시아 국민주 보드카와 감자

산들행 2018. 3. 8. 09:10

나라마다 국민주라고 할 만큼 애호하는 술은 하나씩 있다. 한국은 소주, 일본은 사케, 중국은 고량주, 독일은 맥주, 프랑스는 와인, 영국은 위스키, 미국은 버번위스키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무엇일까? 단연 보드카이다.

 

보드카 맛에는 러시아인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하얗고 투명한 보드카는 특별한 냄새도 맛도 없지만 일단 목구멍으로 넘기면 금세 몸 안으로 뜨거운 기운이 감돈다.

 

그렇다면 보드카는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보드카Vodka는 '물'을 뜻하는 러시아 단어인 보다Voda에서 유래했다. 러시아인들은 보드카를 생명의 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처음 보드카는 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약으로 쓰였다. 점차 그 맛에 반해 술로써 쓰기 시작했는데, 15세기에 이르면 온 러시아인들이 즐기는 국민 술로 자리 잡는다.

 

보드카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 표트로대제이다. 1697년 3월 네덜란드로 떠났다가 1698년 러시아로 돌아온 후 서유럽의 새로운 문물들을 도입했다. 특히 표트로대제는 서유럽에 머물 때 감자를 먹어보고는 감자의 뛰어난 맛과 효율성에 감탄했다. 인구의 절대 다수가 가난한 농민인 러시아 현실을 떠올린 표트로대제는 감자를 러시아에서 대량 재배한다면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워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 기대만큼  감자는 밀이나 보리를 대신해 제2의 빵이라 불릴 정도로 농민들에게 톡톡히 도움을 주었다. 또한 감자의 도입은 보드카 제조에도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그전까지 보드카는 주로 밀이나 보리, 호밀로 만들었는데, 감자가 들어오면서 감자도 보드카를 빚는 데 쓰인 것이다. 감자를 넣어 만든 보드카는 밀이나 보리로 만든 보드카보다 더 맛이 고소했다. 그래서 지금은 러시아와 폴란드를 비롯한 많은 나라가 밀이나 호밀보다는 싸고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감자를 더 많이 이용해 보드카를 만든다.

 

표트로대제가 추진했던 북방 정책도 보드카와 관련이 깊다. 처음의 목표는 남쪽의 오스만 제국이었지만, 군사력이 막강한 오스만제국은 러시아의 공격을 막아내며 끈질기게 버텼다. 그는 북방의 대국인 스웨덴을 쓰러뜨리고 발트 해를 손에 넣으려는 계획을 구상했다. 그러나 전쟁에는 예나 지금이나 돈이 많이 든다. 이를 고민하던 표트로대제는 기발한 생각을 짜냈다. 러시아인들이 일상적으로 즐겨 마시는 보드카를 국가에서 독점 판매하여 그 수익으로 전쟁 비용을 마련한다는 발상이었다. 물론 이런 구상이 순순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때까지 러시아인들은 저마다 가정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보드카를 자유롭게 만들어 마셨는데, 이제 그 일을 정부에서 독점한다니 달갑게 반겼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표트로대제는 귀족과 평민들의 반대를 강압적으로 억누르고, 1697년 보드카의 생산과 판매에 관한 모든 권한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나섰다. 그러나 현명하게도 표트로대제는 강압적인 수단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전쟁에 참가하는 모든 병사와 그들을 따라다니며 군수 시설과 조선소, 배를 만드는 노동자들에게는 매일 무료로 보드카를 나누어주어 환심을 사기도 햇다. 어찌했든 보드카를 팔아서 번 돈으로 전쟁 비용을 충당한다는 표트로대제의 생각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709년 7월, 폴타바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표트로대제가 직접 지휘하는 러시아군에게 크게 참패했다. 그 승리의 원천이 보드카를 팔아서 번 수익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1751년 6월 8일, 옐리자베타 여제가 정보의 보드카 독점 판매권을 철폐하는 법령을 발표하기 전까지 보드카에서 나오는 세금은 러시아 국가 전체 수입의 40퍼센트나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러시아 사람이 보드카를 마셔댔는지 짐작이 가는 수치다.

 

표트로대제와 더불어 보드카 역사에 획을 그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mitri Mendekeev이다. 1865년에 그는 알코올 도수는 40도가 가장 적당하고, 그 정도 술은 인체에 해가 없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보드카의 알코올 도수가 40도에 맞추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보드카는 러시아에서 여전히 인기 있는 술이지만, 국민들이 보드카를 너무 마셔 알코올 중독자들이 늘어나고 그 바람에 평균 수명이 58세에 머무는 등 보드카가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누가 말했듯이 보드카를 빼고 진정한 러시아를 알 수는 없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광활한 대국인 러시아를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보드카를 마셔보기 바란다.

 

-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 지은이 도현신
- 펴낸곳 시대의창
- 개정판 1쇄 2017년 9월 4일 펴냄
- p379 ~ 389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