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쌀

충주비료공장과 식량증산 그리고 화학공학의 발전

산들행 2019. 3. 25. 11:34

상품으로서의 비료, 즉 금비는 일제강점기 계속 권장되었으나 농민들이 현금 경제에 편입되지 않았으므로 보급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금비로의 전환은 시간문제였다. 농민들이 금비를 선호해서라기보다는 질소비료를 통한 증산이라는 목표에 맞추어 기술시스템이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비료를 쓰고, 더 많은 물을 주고, 그 효과를 더 잘 살릴 수 있는 품종을 개발하는 것, 그리고 그 품종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것 등, 한마디로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여 더 많은 수확을 얻는 것이 근대 농업기술의 한결같은 목표였다. 전근대농업은 전반적인 생산력이 낮고 환경에 의한 수확량의 변화 폭이 컸으므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풍흉의 격차를 줄여가며 살아남아 다음 해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근대 농업은 농민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모험적인 투자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다투입-다수확의 가능성이 애당초 기술적으로 막혀 있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본직적으로 다른 형태의 농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돈을 주고 사 쓰면 기존의 자가제조 퇴비보다 월등히 높은 수확량을 보장하는 화학비료, 화학비료와 궁합이 잘 맞는 새로운 품종, 그리고 수확물의 자가소비보다 판매를 통한 현금 수입에 중점을 두는 영농 및 유통문화는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 농민과 농촌의 모습을 바꾸어갔다. 


이런 까닭에 비료공장은 일제강점기의 가장 중요한 산업시설 가운데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생겨난 공업시설 가운데 가장 크고 번성했던 것이 함경남도 홍남의 질소비료공장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한반도와 만주의 비료를 도맡아 공급하던 홍남의 조질 비료 공장은 분단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남한에는 변변한 비료공장이 없는 상황이 되었고, 한국전쟁 후 남한을 제건하는 데 비료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상공부장관을 역임한 화공학자 안동혁(安東赫, 1906~2004) 같은 이는 남한 경제의 재건을 위해 "3F"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자금(fund), 연료(fuel) 그리고 비료(fertilizer)가 그것이다. 그에 따라 이승만 정부는 비료공장을 짓기 위한 미국 원조를 요청하고, 미국 국제협력처(ICA)의 자금으로 맥그로-하이드로카본 컨소시엄(McGraw-Hydrocarbon Consortium)과 계약하여 충주에 비료공장을 건설하였다. 1961년 준공된 충주 비료공장은 외국 원조로 건설되 대표적인 산업 설비였다. 이후 1960년대 더 많은 비료공장들이 건설되고 가동되면서, 1970년대 초에는 질소비료의 자급 능력이 갖추어졌다. 이는 1970년대 "녹색혁명"의 필요조건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충주비료공장은 한편 한국 과학기술사에서 단순한 비료공장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대규모 호학공학 설비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기술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남한의 기술자들은 화학공학의 실제적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의 폐허가 아직 곳곳에 널려 있을 무렵, 충주비료공장의 건설과 운영 과정은 전후 최초로 미국공학의 첨단지식과 기술을 생생하게 볼 수있는 전시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연수받고 작업 경력을 쌓은 공학자들은 다른 공장들로 퍼져나가 선진 엔지니어링 지식과 기법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 김태호 지음

- 도서출판 들녘

- 초판 1쇄 발행일 2017년 4월 25일

- p84~86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한국의 과학과 문명 10)(양장본 HardC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