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쌀

기적의 쌀에 대한 강박과 희농1호 사건

산들행 2019. 5. 2. 10:11

'기적의 씨앗'을 찾아서 정부의 각 기관들은 경쟁적으로 해외 다수확 품종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심지어 농업 담당 부서가 아닌 중앙정보부까지도 가세했다. 1964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집트의 열대성 자포니카 품종 '나다(Nahda)'의 씨앗을 밀반입했다. 아랍어로 '깨어남(awakening)'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난 나다는 이집트가 일본에서 도입한 자포니카 품종으로부터 선발하여 육성한 품종으로, 수확량이 높아 이집트 벼 재배면적의 85%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널리 퍼졌고, 1970년대 후반 도열병에 약점을 드러낼 때까지 약 20년 동안 인기를 누렸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나다의 밀반입을 두고 자신이 '제2의 문익점'이라는 등 자랑을 했으며, 심지어 중앙정보부에 대한 국회내무위의 국정감사장에서도 나다의 견본을 내놓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씨앗에 자기 이름의 '희(熙)자를 붙여 '희농(熙農1호)'라는 이름을 짓고, 종자 견본을 대통령 접견실에 놓아둘 정도로 기대가 컸다.


1965년부터 이루어진 희농1호의 시험재배는 서울대학교 농대교수였던 이태현(李台現) 교수가 맡았다. 당시 이태현 교수는 과수학 담당이었는데, 벼 재배전문가인 이은웅(李殷雄) 교수의 도움을 받아 이은웅의 제자였던 김광호(金光鎬) 대학원생이 재배를 도맡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 직원을 매주 불러 시험재배 상황을 보고받을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시험재배 결과 이태현이 직접 감독한 수원에서만 좋은 성적을 냈을 뿐 광주 등 지방의 시험재배는 실패했다. 1965년 <조선일보>는 희농1호의 시험성적을 보도하면서 다른 농학자들의 회의적인 전망을 곁들였다. 관계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태현 교수에게 '심농법(心農法)'에 대한 설명을 따로 듣는 등 상당히 신임하였다. 시험재배로 거둔 30가마의 쌀도 '한톨도 먹지 말고 종자로 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희농1호에 걸었던 기대가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정희는 이태현을 1966년 농촌진흥청장에 임명하고 희농1호의 실용화 연구를 계속 맡겼다. 하지만 결국 희농1호는 기후 적응에 실패했고, 이태현은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타를 받았다. 국정감사에서 희농1호의 시험성적 제출을 요청했으나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고, "수확은 했지만 말려가지고 쌀을 만들자면 시간이 요하고 통계분석할려고 하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변명하였다. 11월까지 수확량 집계가 되지 않았다는 상식밖의 답변을 하였고, "일주일 전만 미리 통고해 주었으면 데이타를 제출할 자세가 되어있다"고 변명하였다.


1966년 시험 결과가 긍정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인 1967년에는 희농이 일반농가에 보급되었다. 그러나 재배결과는 "씨받이마저 어려운" 흉작에 그쳤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이태현을 경질하고 후임에 김인환(金寅煥)을 임명함으로써 희농1호의 실패를 받아들였다.


통일벼 개발은 허문희 서울대 교수에 의해서 1964년부터 1966년까지 IRRI에서 이루어졌다. 허문희 교수는 서울대학교를 휴직하고 1964년 7월부터 IRRI 연구소의 객원연구원이 되었다. 그는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우선 교배한 뒤, 이 제1대 잡종을 다른 인디카 품종과 교배하여 유전적 차이를 극복하는 '삼원교배(三元交配)'를 시도하여 성공하였다. 1966년 7월 말 서울대교수로 복직하였고, 한국(여름)과 필리핀(겨울) 두곳에서 "왕복선발(shuttle breeding)"을 통하여 IR667을 육성하였다. 허문희는 1968년 이태현이 물러난 뒤 후임 농촌진흥청장이 된 김인환에게 자신의 품종들의 장점을 설득했고, 김인환은 허문희의 건의를 받아들여 실용화 연구를 지시했다. 1970년, 200여종의 IRRI 품종 가운데 "기적의 볍씨'가 언론에 공개되었다. 이후 IR667에 속하는 여러 계통을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시험재배하여 "통일'이라는 계통을 선발, 전국적으로 보급하였다.


-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 김태호 지음

- 펴낸속 도서출판 들녘

- 초판 1쇄 발행일 2017년 4월 25일

- p114~118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한국의 과학과 문명 10)(양장본 HardC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