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토론토대학 역사문화학과의 제프리 필처(Jeffrey M. Pilcher)는 "맛(taste)을 역사화(historicizing) 하는 일은 식탁의 관점에서 쓰는 음식의 문화사가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목표"라고 했다. 한 시대에 유행한 '맛'에는 사회적 계층 구조(social hierarchies)가 반영되어 있다. 즉 음식의 역사를 '시대 구분'하기 위해서는 한 사회의 지배층이 향유한 '맛'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파악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개된 음식의 역사를 살필 때도 이러한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 나는 한반도의 음식역사를 살필 때 다섯 가지 사건과 그 시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불교의 유입과 지배층의 육식 기피다. 삼국시대 이후 불교의 유입으로 생겨난 대표적인 계율은 육식 금기다. 지배층에서 불교를 신앙하면서부터 육식 금기가 시작되어 피지배층에까지 널리 퍼져나났다. 북송의 서긍(徐兢, 1091~1123)은 1123년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한 달간 머물면서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당시 고려 왕실의 도축 기술이 매우 서투르다고 적고 있다. 즉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다 보니 도축 기술마저 서툴러 보일 정도로 육식문화가 위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육식을 기피하는 문화는 오히려 나물을 비롯한 채소 음식의 종류와 요리법이 다양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는 원나라 간섭기에 이전까지 위축되었던 육식 문화가 다시 확대되고 새로운 음식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이 시기에 몽골의 여러 가지 고기 요리법이 고려 왕실에 소개된 것으로 추정된다. 1160년대부터 1390년대까지 약 140년 사이에 고려의 지식인 150여 명이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을 방문했고, 그 중 일부는 아예 원나라 관리가 되어 장기간 채류했다. 그 과정에서 증류주인 소주와 두부 등이 한반도에 소개되었다. 또 원나라 황실에서 일했던 고려 여성도 많았기 때문에 상추쌈 같은 고려 음식도 몽골인에게 전해졌다.
세 번째로 고려 말에 유입되어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 된 성리학의 영향이다. 성리학자들은 조상 제사를 으뜸으로 여기며 예서(禮書)에 나온 대로 제사음식을 마련하여 의례를 치르는 일을 중시했다. 특히 중국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가 지은 《가례(家禮)》는 각종 가정의례의 예법과 상차림에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 선비들은 음식의 절제를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네 번째로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연행사(燕行使)의 청나라 방문이다. 연행사는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으고 갔던 사신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연경을 다녀오면서 일기 형식의 '연행록(燕行錄)'을 남겼다. 이 연행록에는 청나라에서 맛보았던 식재료와 음식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를 통해 청나라의 신기한 식재료와 음식이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다섯번째는 최근 서양의 음식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꼽히는 '콜럼버스 교환(Columbian Exchange)'의 영향이다. '콜럼버스 교환'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아메리카의 감자, 옥수수, 땅콩, 강낭콩, 고추, 호박, 파인애플, 카카오, 바닐라, 토마토 등이 유라시아로 건너오고, 유라시아의 양파, 올리브, 커피, 복숭아, 배, 바나나, 사탕수수, 포도 등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역사적인 사건을 가리킨다. 16~17세기 한반도에 들어온 감자, 옥수수, 강낭콩, 고추, 호박 등의 식재료는 100여 년의 적응 기간을 거쳐 18세기에 비로소 조선 사람들의 식탁 위에 올랐다. 특히 감자나 옥수수는 하층민의 기근을 해결해주는 중요한 먹을거리였다. 고추 역시 18세기에 각종 음식의 양념으로 쓰였다.
- 조선의 미식가들 - 주영하 지음 - 발행처 (주)휴머니스트출판그룹 - 1판 2쇄 발행일 2019년 8월 19일 - p1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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