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이후 중세까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자가 유럽을 장악했다. 지중해 패권이 중요했던 것은 후추를 포함한 향신료 때문이었다. 지금도 세계 향신료 시장의 25퍼센트 가량을 점유하고 있는 후추는 가난한 유럽인을 험한 바다로 내몰았다. 목축에 의존한 유럽의 식생활에 후추는 절대적이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유럽인들은 소금에 절인 냄새나는 고기를 먹어야 했다. 열대의 태양 덕분에 풍부하고 독특한 산미가 나는 후추는 서양인의 식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향신료였다.
당연히 고대 로마 시대부터 유럽에서 후추 값은 같은 무게의 금에 맞먹었다. 후추 가격은 원산지인 인도에서 이슬람제국을 거쳐 유럽 상인의 손을 거치는 동안 수십 배가 뛰었다. 높은 후추 가격은 위험한 투자를 불러왔다. 이탈리아는 지리적 이점 탓에 후추 무역의 절대 강자가 되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십자군 전쟁으로 중동 지역에 세워진 라틴 국가와 독점적인 교역권을 갖고 있었다.
후진국 포르투갈이 세계 향신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비결은 후추에 있다. 후추 원가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중간상인의 마진과 관세였다. 국경을 넘을수록 후추 값은 뛰게 마련이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우회해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냈다. 포르투갈은 새로 발견한 항로로 인도와 직거래를 시작해서 관세와 중간 마진을 줄일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여는 촉매제를 제공했다.
스페인 역시 새로운 무역로를 찾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기꾼처럼 보이는 벤처사업가 한 명이 찾아왔다. 콜럼버스는 인도에 가는 길을 알고 있으니 스페인 왕실에서 투자를 해달라고 했다. 그는 영국 왕 헨리 8세에게도 투자 설명회를 열었는데 거절당했다. 그래서 스페인에 온 것이다. 콜럼버스는 후추 무역에 가장 열심이던 이탈리아 제노바 사람이다. 스페인은 콜럼버스를 후원했다.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그렇기 때문에 서쪽으로 계속 가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중남미 카리브해 섬이었다. 콜럼버스는 후추 대신 열대작물과 원주민 몇 명을 노예로 데리고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콜럼버스는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다. 카리브해의 섬들이 서인도 제도로 불리는 이유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발견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결과를 몰고 왔다. 후추 때문이 아니라 남아메리카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금·은·동의 귀금속 탓이다. 식탁을 붉게 물들인 고추와 토마토도 이때 도입되었다. 그러나 에너지, 금융 그리고 과학보다 직접적으로 서양문명에 변곡점을 가져온 것은 후추와 설탕이라는 음식이었다. 후추는 유럽인들을 바다로 뛰어들게 해 넓은 신대륙을 식민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설탕은 확보된 식민지에 심었던 환금작물이었다. 유럽인이 아프리카인을 아메리카로 끌고 간 것은 설탕 농장 때문이었다. 노예무역은 ‘신의 이름’을 들먹이던 유럽 모든 제국주의 국가 의해 반복되었다. 식민지 플랜테이션은 커피·목화·고무·차 농장으로 끝없이 확대되었다. 식민지의 값싼 원재료와 값싼 노동력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서양이 대항해시대 이후 주도한 근대 산업 문명의 역사는 한마디로 후추와 설탕의 역사다. 후추와 설탕이라는 불쏘시개가 없었다면 문명의 변방이자 유럽의 변방이었던 서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들불처럼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설탕과 후추는 서양의 발전을 이끌었고, 그만큼 서양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재앙을 안겼다.
- 음식 경제사(음식이 만든 인류의 역사) - 권은중 지음 - 펴낸곳 인물과 사상자 - 초판 1쇄 2019년 9월 25일 - p 203~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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