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콩

두부는 사찰에서 만들었다. 조포사와 연포탕을 보면...

산들행 2020. 12. 11. 15:44

두부는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나라에 두부가 전래된 것은 중국과 불교문화 교류가 활발했던 통일신라시대 즈음인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부터 두부가 서민층의 음식인 것은 아니었다.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에 두부는 사찰에서 부처님을 공양하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찰에서 주로 두부를 만들었다. 당시 사찰은 많은 토지를 소유했고 부가 집중돼 있었기에 음식문화를 선도할 수 있었다. 자연히 두부 제조법도 사찰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두부가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쓴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로 알려져 있다. 이 문헌은 '지금 해야 할 일 28가지'라는 뜻으로, 신하가 왕에게 올린 건의문이다. 이 문헌에서 최승로는' 행인에게 미음, 술, 두붓국으로 보시하는 일은 체통이 서지 않은 일이니 삼가라'고 왕에게 건의한다. 작은 일에 왕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는 큰 그림을 그리라는 뜻이었다.

 

고려 말의 성리학자인 목은 이색은 두부를 먹고 그에 대한 시를 썼다. 그의 문집 ≪목은시고牧隱詩稿≫ 에는 두부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온다. 귀한 음식답게 두부는 당대의 귀족이나 명망 높은 학자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서거정과 권근도 두부를 예찬하는 글을 남겼으며, 미식가였던 추사 김정희도 두부를 위대한 음식으로 꼽았다.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왕실과 양반에게 두루 사랑을 받은 셈이다. 

菜羹無味久(채갱무미구) 오랫동안 맛없는 채소국만 먹다 보니

豆腐截肪新(두부재방신) 두부가 마치도 금방 썰어낸 비계 같군

便見宜疏齒(편견선소치) 성긴 이로 먹기에는 두부가 그저 그만

眞堪養老身(진감양노신) 늙은 몸을 참으로 보양할 수 있겠도다

 

조선시대에도 두부는 역시 사찰에서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억불 정책이 펼쳐지면서 사찰 수가 크게 줄었으나, 왕이나 왕비의 무덤(능침陵寢) 근처에는 왕실을 수호하고 제사를 담당하는 능침사찰을 두었다. 특히 왕실과 양반이 즐겨 먹었던 두부는 제사상에 꼭 필요한 음식이었기에 두부 만들기는 능침사찰의 중요한 책무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능침사찰을 '조포사造泡寺'라고도 했다. 조포는 '두부泡를 만든다'는 뜻이다. 언뜻 생각하기엔 기능적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 같지만, 불교 입장에서 보면 무척이나 모욕적이고 비하하는 이름이었다. 어쨌거나 불교가 억압받는 상황에서 능침사찰을 통해 불교와 함께 두부의 명맥도 이어올 수 있었던 셈이다.

 

조포사로 이름난 곳은 세조의 능인 광릉을 수호하던 봉선사, 사도세자와 정조 등을 모신 융건릉을 수호하던 화성 용주사 등이 대표적이다. 사찰에서 두부를 만들다 보니 자연히 스님은 두부를 제조하는 장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찰은 곧 두부'라는 인식 때문인지 두부를 먹기 위해 사찰을 찾는 양반이 많았다. 특히 조선시대 사대부 사이에서는 연포탕軟泡湯이 인기 있는 음식이었다. 연포탕은 닭 육수에 꼬치에 꿴 두부를 넣어 끓인 것이다. 사대부는 연포탕을 즐기는 연포회라는 모임도 만들었는데, 연포를 내놓으라며 사찰에 몰려가 횡포를 부리는 사대부도 있었다.

 

사찰음식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야 많지만, 아마도 두부가 가장 불교적인 음식이 아닐까.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모두 사찰을 통해 두부가 발전했고, 지금도 사찰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 두부는 불교가 겪은 고난의 시간을 견디며 스님들의 눈물과 땀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 성스러운 한 끼

- 박경은 지음

- 펴낸곳 서해문집

- 초판 1쇄 발행 2020년 5월 25일

- p125~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