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박정희 정부는 5~6년 묵은 정부미(정부가 비축해둔 쌀) 처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학교 급식에 쌀밥을 내게 하거나 쌀을 활용한 가공식품 개발을 지원하는데 적극 나섰다. 27년만에 혼합식 소주 생산을 허용한 것도 바로 그 같은 논리에서였다. 잉여농산물을 처리하는 역할을 맡은 게 소주뿐이였던 건 아니다. 막걸리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곡물로 빚은 증류식 소주 생산을 금지할 때, 마찬가지로 막걸리 원료도 고구마나 옥수수, 수입 밀 따위로 대체하게 했다. 이런 낯선 재료로 억지스럽게 담근 막걸리들은 전통 쌀 막걸리의 톡 쏘면서도 구수하고 은은한 단맛을 내지 못했다. 단지 시큼텁텁했을 뿐. 더욱이 농산물 가격이나 수급 현황에 따라 어느 해에는 고구마를, 어느 해에는 수입 밀을 주원료로 활용하는 등 재료 규정에 혼선이 거듭되면서 막걸리 맛도 수시로 변했다. 막걸리는 한국전쟁 직후 저질 막걸리가 범람한 탓에 도시 서민의 술상에서 밀려났는데, 농민들에게서도 점차 외면당했다. 농사일 할 때 마시는 술이라는 뜻으로 '농주農酒'라고도 불리던 막걸리의 위상은 한없이 위태로웠다.
이러한 가운데 1977년 쌀 막걸리 생산이 다시 허용되었다. 식량 부족국가였던 한국은 이즈음 새마을 운동이 성과를 내고 풍년이 겹치면서 쌀이 남아돌게 된 것이다. 쌀값이 폭락하는 가운데 정부미 제고가 지나치게 늘어나자 쌀 소비 촉진이 시급해졌다. 정부는 막걸리 주원료로 쌀만 쓰도록 규정을 뜯어 고치는 한편 쌀 막걸리 제조 강습회를 여는 등 보급에 적극 나섰다. 14년만에 쌀 막걸리가 귀환했다는 소식에 애주가들은 물론 막걸리 업계, 언론 등 모두가 들뜬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마침내 1977년 12월 7일, 쌀 막걸리가 돌아왔다. 전국 대폿집들은 초저녁부터 쌀 막걸리를 맛보려는 주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나이 든 사람들은 반갑다며 주문하고, 젊은 사람들은 새롭다며 주문했다. 쌀 막걸리만 찾는 손님들이 몰리면서 "쌀 막걸리 떨어졌습니다"라는 안내문을 내붙이는 가게들이 속출했다. 쌀 막걸리 수요가 폭팔하자 대폿집에서 웃돈을 받고 파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몇몇 비양심적인 도매상들이 물을 타서 유통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막걸리 붐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쌀 막걸리에 실망한 이들이 많았다. 중장년층에서는 '옛말이 아니다'라는 혹평이 줄을 이었다. 그랬다. 전처럼 쌀을 쓰기는 썼는데 맛이 안 따랐다. 정부가 막걸리를 빚는 데 오래 묵은 비축미만 쓰게 한데다 그 품종마저 맛없기로 유명한 통일쌀이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좋지 않은 원료로 빚은 술이 좋은 맛과 향을 낼리 만무했다.
문제는 맛만이 아니었다. 밍밍하다거나 싱겁다는 반응도 많았다. 막걸리 도수가 1950년대까지만 해도 8도였으나 군사정권 시절에 6도로 낮아졌다. 25~30도 짜리 소주에 길들여진 술꾼들에게 고작 6도인 쌀 막걸리는 약해도 너무 약했다. 한편 경제발전과 식생활 서구화의 영향으로 젊은 층에서는 맥주 선호도가 높았다. 소주보다 순한 술을 찾을 때 이들이 선택하는 건 맥주였지, 막걸리가 아니었다. 쌀 막걸리 가격이 기존 밀 막걸리보다 비싸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다. 농촌에서조차 쌀 막걸리를 외면했다. 정부는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이 고민은 뜻하지 않게 곧 해결되었다. 1979년 쌀 부족문제가 다시 대두되면서였다. 막걸리 원료는 2년만에 한국산 쌀에서 수입산 밀로 대체되었다. 이후 11년간 금지됐던 쌀 막걸리는 쌀 소비 확대 정책이 시행된 1989년(시판은 1990년)에야 다시 허용되었다. 하지만 정책이 갈팡질팡하고 원료가 들쑥날쑥하는 통에 막걸리 산업은 내리막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 우리가 사랑하는 쓰고도 단 술, 소주
- 남원상 지음
- 펴낸곳 서해문집
- 초판 1쇄 발행 2021년 10월 5일
- p257~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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