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은 삼겹살 먹는데이"
3월 3일 삼겹살데이를 홍보하는 문구이다. 이 삼겹살데이가 시작된 것은 2003년 구제역 파동으로 돼지고기 판매량이 급격히 줄어들자 파주연천축협에서 양돈농가 소득 증진을 위해 고안해 낸 것이다. 철판 위에서 고소한 기름내를 사방으로 풍기며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삼겹살을 보고 있노라면 소주는 바로 이 음식을 위해 창조된 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삼겹살은 비계가 많이 붙어 있어 몇 점만 먹어도 입가가 번들거리는데, 이때 느끼해진 입안에 털어 넣은 소주 한 잔이 기름기를 싹 내려보내면서 혀에서부터 위까지 이르는 길을 시원하게 행궈준다. 삼겹살 한 점에 소주 한 잔 털어넣고 죽죽 찢은 구운 김치에, 자글자글 끓는 기름속에서 익힌 마늘까지 곁들이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날 때부터 찰떡궁합이었던 듯한 이 조합은, 하지만 역사가 별로 길지 않다. 이 소주는 주로 여름철에 개고기를 안주 삼아 더위를 극복하기 위해 마셨던 술이다. 기름진 부위인 삼겹살을 이렇게 대중적으로 먹게 된 것은 불과 40여 년 전이다. 그 시작이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널리 알려진 속설에 따르면 탄광촌 광부들이 목에 낀 석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값싸고 열량이 높은 부위인 삼겹살을 먹던 것이 차츰 퍼져나갔다고 한다.
유래가 어떻든 간에 탄광촌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돼지고기는 흔한 식재료가 아니었다. 양돈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누린내가 심했거니와, 한약 복용 중에는 기름기 많은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거나 '여름철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라는 믿음은 돼지고기 소비를 꺼리게 만들었다. 실제로 여름만 되면 돼지고기 소비량이 현저히 줄어들곤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돼지고기는 비위생적인 고기, 따라서 바싹 익혀 먹어야 하는 고기, 그렇게 먹지 않으면 식중독에 걸리는 고기로 여겨졌다. 이런 상황이 바뀐 건 1960년대 말, 정부가 양돈을 수출 산업으로 육성하면서부터다. 살코기 등 인기 부위는 일본, 홍콩 등으로 수출하고 잡내가 심한 비계, 내장, 족발 등은 국내에서 소비했다. 비계투성이 부위였던 삼겹살은 싸구려 식재료로 취급을 받았다. 냄새를 없애기 위해 김치나 양념을 더해 볶거나 생강, 후추 등을 넣고 삶아 편육으로 먹는 정도였다.
하지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양돈 기술이 발달하고 조리법이 개발되면서, 또 경제 성장에 따라 육류 소비가 증가하면서 돼지고기 수요는 점차 늘었다. 그러면서 수급에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데, 수출 상황이나 소고기 가격 변동에 따라 돼지고기 가격도 폭등과 폭락을 거듭했다. 특히 1978년 '육류 파동'은 심각했다. 자고 일어나면 소고기와 돼지고기 값이 무섭게 치솟았다. 정부는 돼지고기 가격 안정을 위해 일본 수출을 중단하는 한편 양돈 농가에 융자까지 내주며 양돈을 장려했고, 대만과 일본으로부터 돼지고기 수천 톤을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다음해에 터졌다. 돼지고기가 남아돌다 못해 가격이 바닥을 친 것이다. 팔아봤자 손해라며 농가에서 새끼 돼지는 내다버리는 지경에 이르자 정부는 융자 상환 기한을 연기했다. 이어 대규모 돈육가공공장을 설립해 돼지고기를 햄, 소시지 등으로 가공할 계획을 세우고 돼지고기 수매를 대폭 늘렸다. 하지만 수입 돼지고기까지 상당량 비축된 상황에서 가격 폭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주요 수출 대상국이었던 일본에서도 돼지고기 과잉생산이 심각해져 한국산 수입을 중단했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이에 정부는 소고기값을 대폭 인상했다. 비싼 소고기 대신 값싼 돼지고기를 사 먹으라는 암묵적인 지시였다. 급기야 1979년 서울시는 음식점들로 하여금 주 2~3회 이상 돼지고기 요리를 내놓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대폿집들이 삼겹살 로스구이를 메뉴에 올리기 시작했다. 편육이 아닌 구이로 먹어도 소주에 그럭저럭 어울렸고, 술집 입장에서는 삼겹살이 값싼 식재료인데다 기름기가 많아 불판에 잘 들러붙지도 않으니 환영할 만했다. 가정에서의 소비도 늘었다. 1980년대 때마침 등장한 휴대용 가스레인지 '부루스타'는 삼겹살을 저변에 더욱 확대했다. 가족끼리 산이나 계곡에 놀러가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다른 부위에 비해 저렴한 삼겹살의 인기도 높아졌다. 1980년대에 이르면 삼겹살은 완연히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삼겹살은 갈수록 수요가 폭증해 1990년대 이후로는 수만 톤을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 속에 성립된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라는 공식은 1997년 외환위기로 더욱 굳어졌다. 여기에 1997년 쌀과 소고기를 제외한 농축수산물시장 전면 개방에 따라 냉동육 수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기업 도산으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퇴직금을 탈탈 털어 식당을 열었다. 수입 삼겹살을 파격적인 가격에 내놓는 고깃집이 도시 구석구석 자리 잡게 된 요인이 여기에 있다. 밥상 사정이 이러하니 술상 사정은 어땠겠는가. 조금이라도 저렴한 술, 조금이라도 독해서 시름을 더 빨리 잊을 수 있는 술인 소주가 인기를 끈 것은 당연지사였다. 사람 입맛이 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에서는 절대적인 빈곤이나 정부 정책 같은 외적요인에 의해 식탁 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지는 일이 잦았다. 삼겹살이 그랬고, 희석식 소주가 그랬다.
- 우리가 사랑하는 쓰고도 단 술, 소주
- 남원상 지음
- 펴낸곳 서해문집
- 초판 1쇄 발행 2021년 10월 5일
- p216~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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