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 아일랜드, 16세기 말로 접어들 무렵, 아마도 스페인 선박에서 처음 유럽에 소개된 감자는 기존의 생태계에 도입된 외래종처럼 터전을 닦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문제는 유럽의 토양이나 기후가 아니었다. 이곳은(적어도 북부지방은) 오히려 감자에 알맞는 지역이었다. 문제는 유럽 사람들이었다, 이 새롭고 특이한 식물을 재배할 경우 다른 어떤 농작물보다도 작은 공간에서 더 큰 수확을 거둘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감자에 대해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이유가 뭘까?
유럽사람들은 그 이전에 덩이줄기를 먹어본 적이 없었고, 감자는(역시 평판이 좋지 않았던 토마토와 더불어) 가지속 식물이었으며, 사람들은 감자가 나병과 방탕함을 일으킨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 어디에도 감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며, 감자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왔고 그곳의 미개한 피정복민의 주식이었던 탓이다. 감자 먹기를 거부하던 사람들은 여러가지 다양한 핑계를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한 가지였다. 이 새로운 식물은 내부에 인간의 문화를 너무 적게 담고 있는 반면, 개조가 불가능한 자연적 요소를 너무 많이 담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아일랜드는 어떠한가?
아일랜드는 감자가 도입되자 이를 바로 받아들였는데, 당시 아일랜드의 문화적, 정치적, 생물학적 환경은 이 새로은 식물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았다. 이 섬에서 곡류 재배는 극히 저조했고(특히 밀은 거의 재배되지 않았을 뿐더러) 17세기에는 그나마 소규모 경작지도 크롬웰의 원두당(圓頭黨, 영국 청교도 혁명 때의 의회와 사람을 일컫는 말로, 머리를 짧게 깎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에 의해 몰수되어 영국 지주들에게 넘어가는 바람에, 아일랜드 소작농들은 사실상 아무 것도 재배할 수 없는 볼모의 빗물 침수지로 내몰려 생계를 꾸려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감자는 식민지시대의 영국인들조차 포기한 바로 그 땅에서 막대한 양의 식량을 일궈내며 기적적으로 자라났다.
아일랜드인들은 토지 생산성이 지극히 낮은 땅이라도 몇 평만 있으면 대가족과 가축을 다 먹일 만큼의 감자를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소위 말해 '놀고 먹는 땅'에서 최소한의 노동력과 최소한의 농기구를 이용해 감자를 재배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감자는 탄수화물의 형태로 열량을 내는 것 외에도(유럽에서 괴혈병을 몰아낼 수 있었던) 상당한 양의 단백질과 비타민 B와 비타민 C를 공급했으며, 부족한 영양소라면 비타민 A였는데 그정도는 소량의 우유로 보충이 가능했다. 감자는 재배하기도 쉬웠지만 요리하기는 더 쉬웠다. 땅에서 캐낸 뒤 냄비에 넣고 삶든 불에 던져 넣든, 그저 익힌 다음 먹으면 그만이다.
이로써 17세기 말까지 감자는 유럽에서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그후 2백년이 안되어 유럽을 휩쓸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새로운 서식지를 상당 부분 재형성하였다.
- 욕망의 식물학
- 마이클 폴란지음/이창신 옮김
- 펴낸곳 : (주)서울문화사
- 제1판 1쇄 발행일 2002년 1월 30일
- p269 ~ 272
-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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