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역사에서는 로마가 밀을 주식으로 한 이래로, 밀은 곡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에서 벗어난 적이 한번도 없다. 로마는 밀이 부족하면 시칠리아와 이집트 등 지중해의 산지에서 밀을 사들였고 로마의 위정자들은 시민에게 값싼 밀을 공급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이런 이유로 미국으로 이민 온 이들 가운데 빵집을 운영하는 사람은 대부분 이탈리아 출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빵이라고 하면 독일이나 프랑스의 빵부터 알려졌지만 밀가루를 다루는 데에는 역시 이탈리아 사람들이었다.
쌀이나 보리의 도정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쌀과 보리는 말린 알곡을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는 것만으로도 껍질을 벗겨낼 수 있다. 하지만 밀은 낟알이 쉽게 깨지기 때문에 통째로 가루를 내고, 체에 걸러서 껍질을 분리하여 밀가루를 따로 모아야 한다. 그렇기에 껍질과 배젖 분리 등 도정방법에 따라 밀가루의 품질은 현격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또 밀 제분은 집에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기에 제분공장을 만들어 대규모로 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그래서 수력 같은 자연의 힘을 빌리거나 동물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한층 유리했다. 또 도정기구를 제작하고, 껍질과 가루를 분리하기 위해서 송풍장치 같은 여러 기계의 힘을 빌려야 했다. 이처럼 밀의 도정과 제분이라는 공정에는 수많은 단계와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연히 여러가지 기술발전을 촉진했다. 물론 로마의 기술발전에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수로 건설, 도로의 중요성을 인식한 토목기술의 발달, 그리고 수많은 전쟁 등 많은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밀을 주식으로 했던 것도 그 원인 중 하나였으리라....
쌀의 도정은 아주 작은 규모로도 가능하고 실제로 쌀의 산지마다 조그만 정미소가 세워져 있거나 농가마다 소형 정미기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 밀은, 대부분의 원료를 수입하는 것도 그 원인이겠지만, 대규모 제분공장이 따로 있다. 밀을 제분하려면 큰 규모의 공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도정하는 밀이 경질인가 연질인가에 따라 글루텐 함량도 차이가 나지만 껍질과 배젖 분리 등 세심한 공정을 위해서도 큰 규모의 제분소를 마련하는 수 밖에 없다.
빵을 만드는 일은 우리가 밥을 짓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였다. 쌀밥은 물에 씻어 물과 불의 기운을 맞추면 금세 밥이 되지만, 빵은 밀가루에 효모를 섞고 여러번 반죽하는 데에도 몇 시간이 걸리고 오븐이 적정한 온도가 되도록 먼저 불을 때고 반죽을 넣고 굽는 고된 공정을 거쳐야 빵이 완성된다. 이런 복잡한 공정을 일반 가정에서 끼니때마다 뒤풀이 하기가 어려워 중세 유럽에서는 장원마다 빵 공장을 운영했다.
- 식전, 팬더곰의 밥상견문록
- 장인용 지음
- 도서출판 뿌리와 이파리
- 2010년 10월 30일 초판 2쇄 펴냄
- p135 ~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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