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난한 시골 마을을 한국 치즈산업의 중심지로 만든 사람은 지정환 카톨릭 신부다.
그의 원래 이름은 세스테벤스 디디에마리(Didier t'Serstevens, 1931 ~)다. 28세 젊은 나이에 가난한 나라 한국행을 자청했던 벨기에 사람이다. 지정환 신부는 1959년에 처음 한국에 왔다. 그리고 5년 뒤인 1964년에 전라북도에 있는 임실 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신부의 환영회가 열린 자리에서 임실군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신부님께서 이렇게 가난한 산골에 오래 계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몇 년 후에 떠나실 때는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임실 주민 전체를 위해 무언가 하나쯤은 꼭 남겨 주셨으면 합니다."
임실은 낮은 산과 들로 이루어진 땅이어서 어디에나 풀이 널려 있었다. 지정환 신부는 풀이 풍성하다는 데 착안해서 산양 두 마리를 방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6년 산양협동조합을 설립했다.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생산한 산양유를 공동 판매했다. 그런데 난관에 봉착했다. 판로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다 보니 남아도는 산양유가 쌓여갔던 것이다. 잉여 산양유의 처리 방안을 고민하던 중 지정환 신부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치즈 생산이었다. 하지만 치즈를 생산할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3년 동안 실패를 거듭했다. 지정환 신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공장과 대학에서 치즈 제조기술을 전수받고 3개월 만에 임실로 돌아왔다. 그 후 드디어 상품으로 판매가 가능한 수준의 치즈를 생산해냈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채더 치즈(Chedder cheese)였다. 임실에서 생산된 치즈는 조선호텔을 비롯한 여러 유명 호텔에 납품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천주교 각 교구의 주교와 신부들이 유신에 반대하는 투쟁의 일선에 섰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유럽 순방 뒤 귀국하다가 공항에서 납치되다시피 연행되어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고 명동 성모병원에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시골 성당 신부로 봉직하면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치즈를 생산하고 있던 지정환 신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는 정의가 환히 빛날 때까지 지랄하는 지정환이다. 지학순 주교를 풀어주고 나를 대신 잡아 가둬라!"
지정환 신부는 유신정권을 계속 비판하면서 시위에 앞장섰다.
"거 지정환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뭐야?"
그 소식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관에게 짜증스럽게 물었다.
"전라북도 임실에 있는 신부인데, 주민들하고 함께 치즈를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신부면 제 할 일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그런데 치즈 애기는 또 뭐야?"
"임실에는 풀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양하고 젖소를 방목해서 나온 우유로 치즈 공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조합까지 만들어 농민들한테 돈을 제법 벌게 해준다고 들었습니다."
새벽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하는 <새마을 노래>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던 시절이었다. 지정환 신부를 강제 추방하려고 작정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 지정환이라는 신부 말야....., 그 신부는 그냥 놔둬."
박정희 정부는 지방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명목으로 몇몇 대기업을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유가공 업체도 예외가 없었다. 경상남도에는 매일우유, 경기도에는 서울우유가 자리를 잡았다. 전라북도에 들어선 업체는 롯데유업이었다. 지역에서 롯데유업이라는 대기업이 자리를 잡게 되자 자체 브랜드로 치즈를 생산해서 판매해 오던 임실군은 발칵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정환 신부는 임실군민을 대표해서 롯데유업으로 직접 찾아갔다.
"귀 회사는 대기업이니까 우유도 대량으로 공급할 테지요. 앞으로 혹시 귀 회사의 농장에서 생산한 우유의 물량이 달리면 우리 임실에서 생산된 우유를 사 가십시오. 물론 귀 회사의 우유가 남아돌면 저희가 사겠습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귀 회사에서는 치즈만을 생산하지 말아 주십시오. 치즈가 필요하다면 우리 군에서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임실 군민들에게 치즈는 목숨과도 같습니다. 귀 회사가 기왕 임실에 들어왔으니 지역민들과 함께 공생관계를 유지해 나갔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롯데유업(현 푸르밀)은 1978년 설립된 후 지금까지 치즈를 생산하지 않고 있다.
전라북도 임실군은 한국 치즈산업의 메카로 불린다. 이런 성과는 가난한 시골 사람들의 삶의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평생 혼신을 다해 노력해 온 지정환 신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음식이 정치다. - 지은이 송영애 - 펴낸곳 채륜 - 1판1쇄 펴낸날 2016년 3월 10일 - p235~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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