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작물

고추의 매운 맛 캡사이신, 새들의 먹이로 진화

산들행 2020. 10. 1. 20:57

포유류와 조류의 캡사이신 민감도 차이는 고추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애리조나 남부의 야생 고추로 실험했더니 새들은 익은 고추를 먹고 씨앗을 발아 가능한 상태로 배설하지만 설치류는 익은 고추를 건드리지 않았다. 고추를 맛본 적이 없는 설치류는 캡사이신을 만들지 못하는 품종을 먹었지만, 똥 속 씨앗은 부서져 발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캡사이신은 설치류가 고추를 먹어 씨앗을 망치지 못하도록 하되 씨앗을 퍼드려줄 조류는 쫓지 않는 선택적 퇴치제다.

캡사이신은 고추속(屬)에만 있지만 모든 고추속 종이 매운 것은 아니며 심지어 같은 종 안에서도 매운 정도가 천차만별이다. 이를테면 고추의 재배품종은 전혀 맵지 않은 피망에서 지독하게 매운 청양고추까지 다양하다. 캡사이신 유무를 좌우하는 것은 Pun1이라는 유전자 하나지만, 캡사이신을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다른 유전자들과 생장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야생 고추 개체군은 캡사이신을 생산하는 것의 분포가 다르며, 이 변이는 국지적 조건에 적응한 결과다. 고추가 처음 진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볼리비아의 야생 고추 캅시쿰 차코엔세 Capsicum chacoense를 연구했더니 이 개체군은 다형성이 있었다. 즉 어떤 것은 맵고 어떤 것은 안 매웠다. 매운 고추의 씨앗에 든 캡사이신은 푸사리움속Fusarium 진균을 퇴치했다. 이 진균은 습한 환경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데, 고추에 구멍을 뚫어 진균이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곤충이 서식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캡사이신을 만드는 고추가 유리했으며 개체수도 많았다. 고추가 자라지만 곤충이 없어서 진균 감염이 적은 건조 지역에서는 맵지 않은 고추가 우세했다.

캡사이신이 설치류와 진균 감염으로부터 씨앗을 보호하므로, 진균 감염의 위험이 있든 없든 설치류가 있는 환경에서는 무조건 매운 고추가 유리하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건조한 지역에서 자라는 고추가 안 매운 이유는 뭘까? 그 답은 가뭄이 들었을 때 매운 고추가 안 매운 고추 만큼 잘 자라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이 귀할 때 매운 고추가 만든 씨앗의 개수는 안 매운 고추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 연구는 식물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만드는 화학물질에 비용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경우에는 씨앗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진화는 수많은 생태학적 요인에 따라 비용과 편익을 저울질 한다. 고추의 경우는 곤충이 열매를 공격하고 진균과 설치류가 씨앗에 피해를 주는 것 말고도 토양의 수분 등 온갖 요인이 작용한다.

식물이 만드는 수만 가지 화합물의 목적은 주로 천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다. 적은 수단으로 많은 결실을 낳는 진화는 몇 가지 성분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이 화학적 다양성을 만들어냈다. 허브와 양념은 진화의 복잡성과 예측 불가능성, 심지어 역설을 잘 보여준다. 이 식물들은 자신을 밥이라 부르는 동물을 퇴치하려고 자연선택을 통해 무장했지만 우리는 바로 그 독 때문에 그 식물들을 좋아해 요리에 맘껏 넣는다.

 

- 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

- 조너선 실버타운 지음 / 노승영 옮김

- 펴낸곳 서해문집

- 초판 1쇄 발행 2019년 1월 25일

- p190 ~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