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전 돌아가신 할머니는 죽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보릿고개를 지낸 그 시대 어르신이 다 그렇듯이 '사흘에 피죽 한 번도 못 먹을 정도'로 굶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뭐라도 먹을거리가 생기면 물을 가득 부어 국 같은 죽을 만들어 가족을 먼저 먹여야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전복죽이나 닭죽처럼 호사스러운 죽 앞에서도 '난 밥이 좋다'라며 밥을 고집하셨다.
요즘은 죽이 건강식으로 주목받고 있고 미식가도 즐기는 다양한 맛의 죽이 나오지만, 대체로 예전 어른에게 죽은 그다지 긍정적 이미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쓰는 관용적인 말을 보면 '죽을 쒔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 '죽도 밥도 아니다'는 식의 부정적 의미가 많다. 한국전쟁을 겪은 비참한 시절의 식생활을 대변하는 음식은 '꿀꿀이죽'이었다.
질곡의 근현대사를 겪으며 죽은 부정적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죽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의미 있고 유서 깊은 음식이다. 곡식을 재배해 수확한 뒤 물을 넣고 끓인 원초적 음식 역시 죽의 일종이다.
조선 시대 임금이 아침에 일어나 처음 받는 상인 초조반상初早飯床의 주된 음식은 죽이었다. 아기가 이유식으로 먹는 것도, 아픈 사람이 먹는 것도, 동짓날 별미로 먹는 것도 모두 죽이었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즐길 수 있는, 게다가 소화도 잘되고 부드럽게 잘 넘어가는 음식이다. 적은 재료를 가지고 더 많은 사람이 나누어 먹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도 정겹고 따뜻한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에서 죽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리수 아래에서 정진하던 싯다르타는 6년간 고행을 하며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 정진하던 싯다르타는 6년간 고행을 하며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 그런 싯다르타에게 마을에 살던 젊은 여성 수자타는 우유로 끓인 '유미죽'을 공양했다. 이를 먹고 기운을 차린 싯다르타는 비로소 깨달음에 이른다. 성도재일成道齋日은 바로 이날, 즉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날을 가리킨다. 불교의 가장 큰 기념일 중 하나인 이날 불교 신자는 사찰에 모여 칠야 정진한 뒤, 새벽에 다 함께 죽을 끓여 나누어 먹는다. 싯다르타를 깨달음에 이르게 했던 죽은 이후 줄곧 사찰음식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고, 이는 깨달음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불교의 오랜 전통이다.
소설가 강석경의 산문집 ≪저 절로 가는 사람≫에 '지난 해 동지 때 가마솥이 팥죽을 젓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수평선 너머로 간 스님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라는 말로 통도사의 풍족한 살림 규모를 자랑했다는 대목이 인상 깊었다. 출가자에게 필요한 계율을 기록한 ≪사분율 四分律≫에는 죽의 효능 다섯가지가 소개돼 있다. 시장기를 달래주고, 갈증을 풀어주며, 소화를 돕고, 대소변을 원활하게 하며, 풍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 성스러운 한 끼
- 박경은 지음
- 펴낸 곳 서해문집
- 초판 1쇄 발행 2020년 5월 25일
- p 07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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