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쌀

새롭게 창조된 경기미 신화 : 아키바레에 대한 동경과 '임금님 쌀' 전설

산들행 2021. 9. 7. 09:50

1970년대를 거치며 소득 수준이 크게 높아진 대도시 소비자를 중심으로 '경기미'에 대한 수요가 폭팔적으로 늘어났다. 1979년에 이미 부유층이 무공해 쌀을 기준 수매가의 두 배 가까운 가격에 계약재배하여 먹는다는 이야기가 언론에 개탄조로 보도되기도 했다. 1983년에는 통일쌀이 대부분인 정부미 가격은 떨어지는데도 일반미 가격은 겨우내 30퍼센트 가까이 급등하는 '일반미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반미 선호는 곧 아키바레 선호였고, 아키바레는 경기도에서 특히 널리 재배되고 있었으므로, 일반미 선호는 이내 경기미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과 접목되어 '경기미 열풍'으로 진화해나갔다. '경기미 열풍'은 1980년대 중반 미군부대 상점의 칼로스(Calrose) 유출과 더불어 상류층의 사치를 상징하는 시건으로 언론의 지탄을 받기도 햇다. 하지만 일단 불붙은 고품질 쌀에 대한 소비자의 욕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일부 양곡상들은 이를 악용하여 호남산 아키바레를 싸게 매입한 뒤 평택, 이천, 여주 등지에서 소분하여 '경기특미'로 둔갑시켜 서울에서 팔아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것은 '경기미 열풍'이 단순히 1970~80년대 당시 아키바레라는 품종이 다른 품종에 비해 우수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기미를 찾는 소비자들과 파는 상인들은 '경기도는 조선시대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의 산지'라는 역사적 기록에서 비롯된 광휘를 아키바레에 덧씌었다. 이천과 여주 지역의 이른바 '자채(紫彩 자줏빛 자 채색 채)쌀'이 조선시대에 왕궁에 진상된 것은 사실이지만. 품종을 따지면 이들 재래종 쌀은 일제가 1920년대에 재래종 종자를 수집했을 때에도 이미 사라져 전하지 않고 있었다. 근대 생물학에서 말하는 품종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전에 붙인 이름이므로, '자채'라는 이름이 특별한 유전적 형질을 공유하는 말에 불과한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즉 '자채쌀'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우리가 '옛날에 임금님께 진상된 쌀'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사실상 거의 없다.

 

이에 비해 일본 아이치(愛知)현에서 1950년대 중반 개발되어 1969년 한국에 도입된 아키바레는 이미 실전된 한국 재래종 벼와는 물론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님께 진상한 경기미'라는 이름으로 아키바레가 입지를 넓혀가는 것에 대해서 소비자들이나 미곡상 어느 쪽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통일벼를 앞세운 강제농정의 강권 시기에 정부가 기어이 뿌리 뽑으려 했고 반대로 농민들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재배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아키바레가 뛰어난 벼임을 보증해주는 훈장으로 여겨졌다. 아키바레는 이와 같은 가까운 과거의 기억을 버무려 자신의 자산으로 삼았다. 통일벼의 기억은 '경기미의 아키바레'가 전국 소비자들에게 일종의 원(原)브랜드로 자리 잡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 최초의 브랜드쌀이 1995년 '임금님쌀'이라는 이름으로 상표를 등록한 경기도 이천산 아카바레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 김태호 지음

- 펴낸곳 도서출판 들녘

- 초판 1쇄 발행일 2017년 4월 25일

- p 255~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