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쌀

'정부미'의 낙인과 호남미의 분투, 품종, 지역 그리고 브랜드

산들행 2021. 9. 7. 10:41

경기미의 인기가 오르는 만큼 호남미는 통일쌀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어 그 인기가 떨어졌다. 1970년대 호남 지방은 통일벼 재배에 앞장섰고 실질적으로 증산을 선도했지만, 동시에 통일벼가 시장에서 받았던 낮은 평가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사실 호남은 한반도에서 으뜸가는 곡창지대였지만, 호남의 살은 예로부터 질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호남은 쌀의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지역이었으므로 호남미는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원거리 수송되는 일이 잦았다. 근대 이전에는 수확 후 처리와 보관 및 운송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거리로 유통되는 쌀은 산지에서 바로 소비하는 쌀보다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면서 호남은 품질은 떨어지지만 값싼 쌀을 한반도와 일본 전역에 공급하는 기지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군산항의 번성에서도 알 수 있듯 호남미의 상당량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이렇게 일본 시장에 들어간 '조선미'는 저가미 시장을 형성하여 일본 도시의 쌀값이 오르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다. 품질보다는 가격이 조선미를 대하는 일차적인 기준이었으므로 조선미, 그중에서도 주력이었던 호남미의 품질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낮게 형성되었다. 이 밖에 해방 후에도 1960년대까지 호남 지역의 수확 후 처리기술이 낙후되어 젖은 쌀이 팔려나갔던 것도 호남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해방 후에도 호남미의 품질에 대한 인식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쌀의 품질보다 우선 생산량을 늘리는 일이 급선무였으므로 쌀의 품질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와 마찬가지로 호남미가 높은 생산량과 낮은 가격으로 쌀 시장을 지탱하는 역할을 계속 떠안아야 했기 때문에, 호남미의 시세가 전국 쌀 시세의 최저선을 알려주는 지표처럼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물가 동향을 알리는 뉴스에는 쌀값을 가장 비싼 '경기미 상등'과 가장 싼 '호남미'로 나누어 보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 보니 물가를 유지하기 위한 정부시책이 호남미 가격에 대한 통제로 이어지기도 했다. 호남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고 호남미 가격을 올려 받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서울 시내에서 소비되는 쌀의 절반이 호남미인데도 '무조건 호남미는 경기미보다 한 가마당 1천환 내외를 싸게' 도매상에게 넘겨야 했고, 그 결과 '호남지방의 농민들에게 연간 400~500억이라는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개선하고자 전라남도 당국에서 '전남미 반출 동업조합'을 조직하고 서울 시내에 '전남미 판매 직매소' 등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가 되어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아, '경기미가 좋다는 말에 호남미를 경기미에 섞어서 파는 행위는 거의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이야기가 신문 지상에 수시로 오르내렸다.

 

통일벼는 호남미에 대한 이러한 기존의 인식을 더 악화시켰다. 앞서 지적했듯이 민간보다는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호남의 경제지리적 여견도 호남 지방의 통일벼의 기억이 왜곡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추곡수매를 통해 확보한 정부비축미는 쌀값 안정을 위해 최장 5년까지 보관하고, 이후 군경 등에서 단체급식으로 소비되거나 시중에 헐값으로 유통되었다. 즉 대도시 소비자들이 구입할 수 있었던 정부비축양곡, 속칭 '정부미'는 길게는 5년 묵은 통일쌀이었다. 통일쌀은 햅쌀로 먹어도 일반미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므로, 정부미는 더 낮은 품질이라는 평판을 면할 수 없었고 이윽고 궁핍의 상징과 같은 낱말이 되고 말았다. 정부미가 되고 만 통일벼가 주로 호남에서 재배되었다는 사실은 호남미에 대한 편견과 결부되었다. 호남 지방은 한반도의 곡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쌀의 품질에서는 줄곧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통일벼의 성쇠를 거치면서 그 편견은 더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일벼가 남부지방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다수확을 올려주기도 했지만, 멀리 있을 뿐 아니라 호남미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시장보다는 추곡수매라는 틀을 유지하는 국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호남 지역의 선택이기도 했다.

 

경기도 이천의 '임금님쌀'이 1995년 최초의 브랜드쌀로 선을 보인 이래 쌀의 브랜드화는 지배적인 흐름이 되어왔다. 특히 쌀 소비가 줄어드는 추세를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브랜드화를 통해 인지도를 높이면 부가가치도 높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크다. 호남산 브랜드쌀 중 시장에 고가로 안착한 '한눈에 반한 쌀'은 전라남도 해남산이지만, 지역을 강조하기보다는 히토메보레라는 품종명의 뜻을 그대로 한글로 옮겨 브랜드 이름으로 내세우고 있다. 호남산 브랜드쌀은 호남산임을 전면에 내거는 경우가 드물고, 산지에 대한 정보를 가급적 줄이거나 '땅끝마을(해남산)'과 같이 간접적인 정보만을 주는 경우가 많다. 호남미의 '탈지역형' 브랜드화 전략은 현재까지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3년부터 농림부의 후원을 받아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브랜드쌀의 품질을 평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호남미가 계속해서 좋은 평을 받은 것이다. 2003년는 품질 상위 12개 브랜드 쌀 가운데 4개가 호남미, 3개가 경기미였지만 2004년에는 상위 12개 브랜드쌀 가운데 6개가 호남산이었다. 물론 품질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 소비자에게 인기를 얻고 시장에서 제값을 받는 것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호남미는 양은 많지만 품질은 낮다'는 인식이 바뀌어 가고 있으며 지역색을 흐리는 브랜드화가 그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 김태호 지음

- 펴낸곳 도서출판 들녘

- 초판 1쇄 발행일 2017년 4월 25일

- p 257~261